정병현 ‘내면 착시’展...불변하는 나의 불완전성, 불규칙의 변주로 발산
정병현 ‘내면 착시’展...불변하는 나의 불완전성, 불규칙의 변주로 발산
  • 황인옥
  • 승인 2021.04.29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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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팔조
오합지에 여러색 안료 올리고
종이 부풀 때까지 바늘로 뜯기
흩뿌려지는 안료는 ‘불규칙성’
뜯기엔 패턴 갖춰 ‘규칙’ 부여
이번 전시에 첫 등장한 곡선
행복할 수 있다는 의지 표현
“잊고 있던 감정 깨울 수 있길”
정병현작-NoLongerMyself
정병현 작 ‘No Longer Myself’

자신과의 싸움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면, 그는 현자(賢者)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밀린다 싶으면 타협할 궁리부터 찾는다. 그만큼 자신과의 싸움이 그 어떤 상황보다 치열하고 처절하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작가 정병현은 외골수다. 시류에 흔들리고,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는 일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인간 정병현과, 작가 정병현이 승부수를 던진 대상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자신이다. “나 스스로 내 삶의 주체가 되고, 나의 화면의 대상이 된다. 나의 가장 큰 화두는 바로 나 자신이다.”

정병현 개인전이 갤러리 팔조에서 지난 24일 개막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만난 분신 같은 작품 30여점을 걸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의 바탕에 깔린 주제는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부분들이지만, 사실 ‘자신의 본질’ 찾기는 작업 초기부터 일관되게 집중해온 주제다. “나는 타인이나 세상보다 나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나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다.”

작업 초기 본질을 찾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식은 의외적이었다. 작가 자신이 아닌 어머니의 헌신적인 삶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려 했다. 그는 어머니의 전유물이었던 보자기를 매개로 어머니(여성)의 희생적인 삶을 표현하며 자신의 본질을 에둘러 모색했다. “나의 뿌리인 어머니와 나를 동일한 형질로 두는 태도를 취했다.”

제3자를 통해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방식은 언젠가는 한계에 봉착한다. 작가 역시 그랬다. 어머니의 삶을 아들인 자신이 이해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자각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 자신이 아닌 이상 그것이 누구이든, 무엇이든 온전히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머니에서 작가 자신으로 탐구의 대상을 바꾼 것은 10여 년 전.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이다. 오직 나만이 나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정병현작2-NoLongerMyself
정병현 작 ‘No Longer Myself’

말이 쉽지 자신을 아는 것이 어디 쉬운가? 누구라도 벌거벗은 자신과 마주하는 것은 불편하다. 그 역시 자신의 본질을 알기 위해 스스로를 탐구하기 시작했지만 어디서부터 접근해 가야 할지 막막했다.

이번에도 어머니를 찾았다. 팔순 노모에게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태몽을 물었다. 태몽을 통해 자신이 갖고 태어난 특질이 무엇인지 밝히고 싶었다. 어머니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물’이었다. “어머니가 물속에서 조개를 건져 올리는 태몽을 꾸었다고 하셨다. 물질계를 구성하는 4대 구성요소 중에서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이 물이라고 믿었다.”

물이 곧 작가 자신이라는 공식이 서자 이번에는 물과 관련된 물성을 찾았다. 일단 물을 수용하는 물질이어야 한다는 전제로부터 물성을 찾아 들어갔다. ‘물’하면 떠오르는 물성은 한지. 물을 흡수하는 한지의 성질에 주목했다. “물을 흡수하는 물질로 한지만 한 것이 업었죠.”

한지는 물을 흡수한다는 이유로 선택했지만, 물감은 반대의 경우이기를 바랬다. 어떤 물질과도 섞이지 않은 순수성을 추구하고 싶었다. 색상, 명도, 채도에서 순수성을 간직한 물감, 바로 안료였다.

정체성의 다른 이름은 자화상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자화상을 찾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을 적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작가가 선택한 방법은 ‘뜯기’였다. 다섯 겹의 한지로 만들어진 오합지 위에 검정색과 흰색을 겹쳐 올리거나, 그 사이에 더 많은 색들을 올린 후 바늘로 뜯어내는 식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작업 도구는 효율성을 위해 바늘에서 타투 도구로 바꾸었다.

작업의 핵심이 뜯기다. 오합지에 색을 올린 후 보푸라기처럼 부풀어 오를 때까지 타투 도구로 표면을 뜯어낸다. 이때 뜯어내는 패턴은 규칙적인데, 일정 간격을 두고 뜯은 면과 뜯지 않은 면이 이어진다. 그러나 뜯어내기 전 오합지에 올려지는 형상들은 불규칙 그 자체다. 작가는 이 불규칙성에 자신의 본질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자신의 본질은 다름 아닌 ‘불완전성’이었다.

그가 “불변하는 나의 본질은 불완전성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생노병사는 인간의 숙명이다. 그것이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로 만든다. 그것만큼 불변의 진리는 없다. 나 역시 인간이고, 그렇게 보면 나의 정체성은 불완전함임을 자각했다.” 

정병현작가
정병현

화면 속 형상은 오직 점, 선, 면으로만 구성된다. 안료의 중첩으로 형성되는 형상은 불규칙성을 원칙으로 하지만, 뜯기는 어느 정도의 규칙을 허용한다. 화면을 위와 아래로 분할하고, 옆으로는 수많은 세로선으로 또 다시 분할하고, 분할 된 세로 선을 위와 아래 면이 엇갈리도록 뜯어내는 과정에 일정 부분의 규칙이 적용되는 것. 불규칙 속의 규칙인데, 작가는 그 속에 불완전하게 태어났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의 태도를 이야기하려 한 것 같다.

화면은 추상과 구상의 중간지대다. 색과 점, 선, 면이라는 회화의 기본 요소들로만 화면을 구축하여 형태를 꾸렸다. 때문에 형태에 대한 시각적인 가독성은 낮다. 낮은 가독성에서 추상적인 요소가 짙게 배어난다. 이러한 전개 방식은 불완전성을 강화하기 위한 작가 특유의 표현법에 해당된다.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담아내기 위해 나를 둘러싼 외피들을 걷어냈다. 외피 속에 숨겨진 나의 본질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 중에서 신작들도 포함됐다. 신작에는 직선이 아닌 곡선 패턴들이 새롭게 등장한다. 불안한 직선들의 포효 대신, 곡선의 실루엣으로 안정감을 들여놓았다. ”아직은 무엇을 해 놓은 것 없는 인생이지만, 문득 그런 나도 행복할 수 있다는 자각을 했다. 곡선은 불완전하지만 행복할 수 있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작품 제목은 ‘더 이상 내가 아니다’다. 이 상용구는 ”이전보다 진일보한 성장을 이뤘을 때“ 사용하는 문장이다. 말하자면 세상을 향한 자신감의 표출이다. 도대체 그를 이토록 당당하게 만드는 배경은 무엇일까? 그가 ”자유“를 언급했다. ”나의 이야기를 내가 하는데 얼마나 자유롭겠느냐“는 의미의 ‘자유’였다.

”나는 삶이나 예술에서 구속을 받지 않는다. 삶과 예술을 끌고 가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온다. 그 구속없는 상황에서 나는 자유를 누린다.“

자유는 쟁취하는 자의 몫이다. 그는 스스로를 수단으로 삼아 자유를 쟁취한다. 자신을 철저하게 착취의 상황으로 내 몬다. 칠하고 뜯는 반복적인 노동으로 자기 착취가 진행된다. 그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불필요한 외피들을 벗겨낸다. 갑옷처럼 그를 덮고 있던 불순물들이 노동행위로 떨어져 나가면서 비로소 그의 본질은 형태를 드러낸다.

작가는 이 상태를 ”착취자가 곧 비 착취자가 되는 순간“이라고 설명했다. ”자기 착취를 통해 나를 서서히 소멸시키며 진정한 자유를 만끽한다.“

이번 전시제목은 ‘내면 착시(Inner optical illusion)’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보편의 이야기로 확장된다는 의미가 담겼다. 자신의 이야기로 타인의 잠재된 감정까지 일깨우는 것인데, 대상의 확장에 해당된다. 작가는 이 과정을 ‘시각 착시’에서 ‘내면 착시’로의 이동이라고 언급했다.

”감상자가 내가 표현한 색이나 화면 구성을 보면서 망각하고 있던 자신의 감정들을 일깨우는 과정을 표현했다. 나의 감정이 제3자의 감정과 연동되는 것이다.“ 전시는 6월 6일까지 갤러리 팔조에서.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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