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에 잡곡 안 섞여 있으면 교사에 혼났던 1970년대
도시락에 잡곡 안 섞여 있으면 교사에 혼났던 1970년대
  • 김종현
  • 승인 2021.06.1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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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식 세계로] (19) 많이 죽었던 보릿고개
BC 1,500년경 유입된 보리
철기시대 유적발굴 중 ‘맥’ 출토
고조선 시대부터 본격 재배 시작
숙종 ‘이모작’ 농법 권장
벼 재배 끝나면 보리농사 지어
보리 수확하기 전 춘궁기 극심
보릿고개라는 말 생겨나
중세 서양선원, 각기병 앓으면
보리밥을 약용으로 섭취
보릿고개
해방이후까지 계속됐던 보릿고개. 그림 이대영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1898)은 왕족혈통으로는 인조(仁祖)의 제3자 인평대군(麟坪大君)의 8세손, 그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李球, 1788~1836)이 정조(正祖)의 이복형제인 은신군((恩信君, 1755~ 1771)의 양자(養子)로 입적하여 영조(英祖)의 왕가가계에 편입되어 왕위등극에 접근했다. 정조직계(正祖直系)는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 1754~1801)의 손자인 철종(哲宗)으로 이어졌고, 철종(哲宗)이 후사(後嗣)가 없자 혈족이 가까운 모든 왕족에게 왕위쟁탈 논의가 일어났다. 세도정치권자(世道政治權者)였던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견제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어린 국왕으로는 순조(純祖) 11살, 헌종(憲宗) 8살, 철종(哲宗) 18살, 고종(高宗) 12살로 미성년자의 어린나이를 핑계(대의명분)로 안동김씨 가문은 1804년부터 1862년까지 60년간 세도를 장악했다. 불합리한 세도가문에 의해서 국정이 피폐해지는 꼴을 두 눈으로 봐 왔던 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절대로 유력한 사대부에게 다시는 말려들지 않겠다고 절치부심(切齒腐心)했다. 자신의 아들 고종(高宗)의 왕비간택엔 아예 권문세족을 제외시켰고, 중인집안에서 간택하기로 했다. 시아버지가 직접 며느리 감을 현(見)보기로 했다. 과거 왕비간택의 기분은 가문과 미모를 중심했으나 흥선대원군은 심덕(마음씀씀이)을 중시했다. 대원군은 마음씨를 간파하고자 면전에 3가지의 질문을 던졌다. 왕비간택질문은 3가지는 i)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무슨 꽃이고 그 이유는? ii) 조선에서 가장 높은 고개는 무슨 고개이고 그 이유는? iii)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보고자 자신의 아버지 함자를 수놓은 방석에 앉도록 했다. 흥선대원군의 부대부인(府大夫人)이 천거한 여흥민씨 여식(女息)은 민자영(閔玆暎, 1851~1895)이었다.

그녀는 8세에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자랐기에 양반가문의 여식보다 세상물정에 밝았다. 아버지가 없다는 점에서 나쁘게 말하면 호로자식이었다. 그러나 돌아가신 아버지 함자 ‘민치록(閔致祿, 1899~1858)’이 새겨진 방석엔 아예 앉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릎 위에 방석을 모시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꽃은 목화(木花)라며, 그 이유는 엄동설한에 백성들의 추위를 막아주며 포근하게 감싸주기까지 한다고 덧붙였다. 가장 높은 고개로는 보래고개(麥嶺)라고, 춘궁기 보릿고개를 넘기다가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갔다. 그 높이는 얼마나 높은지 측량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대원군의 속마음을 꿰뚫은 대답이었다. 대원군은 분명히 두 귀로 들고도 한 동안 멍하니 말을 못 했다.

◇동서양 서민의 애환을 같이했던 보리

보리(麥)는 일반적으로 10,000년 전 유라시아(Eurasia) 각처에서 최초로 재배되었던 작물 가운데 하나였으며, 기원전 7,000년 이전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속칭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에서 재배되었던 흔적이 있다. 밀과 함께 재배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원산지로는 메소포타미아와 중국 양자강 상류로 양분하기도 한다. 로마시대 가축사료로 쓰이거나 하층민들이 식용했으며, 특히 근육에 좋다고 해서 검투사(gladiator)들이 식용했다. 중국에서 보리맥(麥)자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올래(來)와 천천히 걸을 쇠가 결합되었다고 한다. 즉 보리까끄라기(芒)가 발이 되어 옷 속으로 천천히(走) 올라옴을 회의(會義)한 것이다. 따라서 청나라에서는 보리를 ‘망곡(芒穀)’이라고 했으며, 후한의 채옹(蔡邕, AD 132~192)의 ‘월령장귀(月令章句)’에 “모든 곡식은 봄에 싹이 트고 가을에 열매를 맺는데, 보리는 여름더위에 열매 맺어 가을이 되나니”라는 구절이 있다. 영어 보리(barley)란 단어는 인도유럽어(Proto-Indo-European)에서 ‘베를릭(bærlic, of barley)’에서 왔음을 AD 966년 영국 옥스퍼드(Oxford)사전에서 인용하고 있다. 외양간(barn)이란 영어단어는 보릿짚으로 만든 집(barley-house)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 보리는 BC 1,500년경 동이족의 이동에 따라 한반도에 유입되었다. 1980년 경남 김해시 부원동(府院洞)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Proto-Three Kingdoms Period, BC100~AD 300) 유적발굴 도중 남산 서쪽기슭 패총지역(A)에서 탄화곡물(炭化穀物)로 보리(麥)가 발견되었다. 1996년 충북 충주시 조동리(忠州市 早洞里) 유적발굴 과정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과 같이 쌀, 밀과 보리가 출토되었다. 2011~2014년까지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新昌洞) 선사시대(철기시대, BC 200~ BC 100) 유적발굴에서도 탄화맥(炭化麥)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서 보면 고조선시대부터 재배를 시작했으며, 삼국시대는 물론 고려시대까지 보리와 쌀을 먹었는데 귀족이나 양반들은 미곡을 일반백성들은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기를 원했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조선건국 프로젝트에 따라 이성계(李成桂)는 ‘목자위왕(木子爲王)’이라는 입소문을 확산시켰으며, 동시에 ‘소고기국에 흰쌀밥(牛湯白飯)’이란 생생한 비전을 제시하였다. 아사시신의 악취가 한반도를 휩싸고 있었던 때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고 백성들은 조선건국에 참여했다. 결과는 ‘역시나’로 끝났다. 쇠고기 국에 쌀밥은 고사하고 과거처럼 보리밥도 배불리 먹지 못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다. 비로소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때 들어 벼농사는 혁명적으로 바뀌게 됐다. 직파(直播)와 이앙(移秧)으로 농법을 개선해 이모작(구루갈이)을 하도록 권장했다. 벼농사를 한 뒤 보리농사를 짓는 이모작을 도입, 보리를 경작하게 하여 주곡 쌀이 떨어진 하절기(米嶺)에 보리를 주곡으로 먹을 수 있게 했다. 그런데 보리 수확이전 춘궁기가 극심해 보릿고개(麥嶺)라는 말이 생겨났다. 보릿고개는 조선말과 일제식민지시기에 극심했으며, 해방이후에도 보릿고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편, 중세기 서양에서도 항해선원들이나 특이한 지역의 주민들에게 비타민 B가 부족하여 각기병(脚氣病, beriberi)을 앓았던 때에 보리밥 특식을 약용으로 먹었다. 일본에선 물고기에서 부족한 비타민B 등을 보충하고자 꽁보리밥에 참마를 갈아서 올린 ‘무기토로(むぎとろ)’가 특식이었다. 교토(京都)엔 1576년 창업한 ‘헤이하치자야(平八茶屋)’라는 요릿집이 있는데 이곳에는 무기토로(麥とろ) 음식이 아직도 이름값을 하고 있다. 토쿄(東京) 아사쿠사(淺草)에도 무기토로(むぎとろ) 맛집이 아직도 성업 중에 있다.

우리나라에선 1969년부터 1977년까지 식량절감을 위한 혼(분)식 장려운동이 벌어졌다. 이 때에 학교에선 일정비율로 혼식을 하고 있는지 점심시간에 담임선생님들이 도시락 검열을 했다. 보리쌀 등의 잡곡이 섞여있지 않으면 “(개처럼) 도시락을 물고, 교실구석에 벌을 서라.”라는 명령으로 점심시간 동안 벌을 섰다. “대통령 각하님도 혼식을 하는데”라고 종회시간에 훈시가 시작되기 일수였다. 그때에 누군가 “선생님, 대통령 각하님은 혼식을 해도 반찬이 좋습니다. 우리 반찬이야 무짠지가 전부데요.”라고 질문을 했다가 교무실로 호출되어갔고, 선생님들로부터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돌림매타작만 당했다.

글=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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