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없는 근원적인 세계”
물가 풍경, 회화 대상으로 설정
배경 채색→형상 채색→드로잉
은색·금색으로 극적 분위기 구현
작가 신경철이 대학을 졸업하고 전업 작가로 첫 발을 띠면서 던진 질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가 아니었다. 그가 그림을 논하기 이전에 대면한 첫 질문은 의외로 “어떤 작가로 살 것인가?”였다. 시각적인 서술보다 작가로서 가져야 할 태도부터 점검하는 것이 도리라고 여겼다.
당시 그는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서 해답을 구하고자 했다. “예술가의 책무가 무엇인지”를 상기하고, 그 길을 따르고자 한 것. 그가 기억하는 예술가는 “남들이 가지 않는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들”이었고, 예술가의 역할을 떠올리자 해답은 쉽게 찾아졌다. 그 역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작가”로 살고 싶었다.
그때 불현 듯 학창시절의 습관 하나가 떠올랐다. 당시 그는 형광펜으로 쓴 글씨에 검은색 펜으로 테두리를 치던 습관이 있었다. 기억 속 펜의 질감이 어제 일처럼 생생해지자, 캔버스에 그때의 행위가 재현되기 시작했다. 밑작업으로 드로잉을 하고 그 위에 색을 칠하는 통상적인 그림 그리는 방식을 전복하고, 물감을 묻힌 붓으로 형상을 그리고 연필로 형상에 드로잉(라인)을 가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학창시절의 습관이 그림에 차용된 것이자, 그림 그리는 방법론에서는 역발상이었다.”
어린시절의 기억을 소환하기까지 그를 흔들었던 의문 하나가 있었다. 드로잉을 하고 색을 칠하는 회화의 전통적인 방식은 그의 입장에서는 힘든 작업이었다. 너무나 당연시했기 때문에 의문조차 품지 않았던 방식에 “왜?”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전통 고수’에서 ‘새로운 시도’로 태세 전환을 감행할 수 있었다. “태세 전환은 드로잉과 색칠하기의 순서를 바꾸는 것으로 간단하게 정리됐다.”
그림의 대상은 풍경이다. 연못 주변이나 바닷가 등 주로 물가 풍경을 그린다. 물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의 개입이 없지 않았다. 풍경은 주로 물 위 풍경과 물 속 풍경의 어우러진다. 풍경은 몇 번의 중첩으로 완성된다. 먼저 배경을 칠하고 다듬기를 반복한 후에 은색 물감처럼 금속성을 띠며 빛을 반사하는 물감으로 형상을 그리고, 연필로 형상을 따라가며 드로잉을 가하는 식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그린 이미지는 이미지의 ‘재-이미지화’ 혹은 ‘탈-이미지화’로 규정할 수 있다.”
그의 관심은 가시적인 대상으로서의 풍경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그 너머의 차원을 향한다. 바로 정제되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가 “힘들고 지칠 때 찾아가서 휴식하며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 오는 풍경”이라고 언급했다. 말하자면 근원으로서의 풍경에 대한 언급이었다. “모든 인간은 근원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에는 스트레스와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그리는 풍경은 바로 우리가 갈구하는 근원적인 풍경이다.”
색은 단색을 선호하지만 여름의 초록이나 가을의 갈색, 겨울의 회색이라는 흔한 풍경의 공식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일상에서 만난 대상들 중에서 의식에 파문을 일으키는 색상들이 주로 채택된다. 근원의 세계에 현실의 색체가 입혀지는 것.
“거리의 간판이나 사람들의 옷차림, 광고에 사용된 색 등 다양한 색들이 풍경색으로 선택된다. 예컨대 어머니가 자주 하고 다니는 스카프 색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 색으로 그린 풍경에서 어머니를 떠올리는 식이다.”
단색에 대한 선호는 나빠진 시력의 영향이 컸다. 렌즈 삽입 수술까지 하게 되면서 병원으로부터 실내와 실외 모두 선글라스를 착용할 것은 제안할 정도로 그의 눈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색 사용에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눈 수술을 하고 그림을 못 그릴 줄 알았다. 다행히 그림을 그릴 수는 있게 되었지만 눈이 더 나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선글라스도 끼고, 색 사용도 단촐하게 하게 됐다.”
신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인 연필로 하는 드로잉(라인) 작업은 반복적인 노동의 연속이다. 나뭇잎 하나, 꽃잎 하나에 수십 번의 라인을 그린다. 100호짜리 그림에 그려지는 라인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할까? 작가도 처음에는 라인 그리는 행위가 숨이 막히도록 답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15년 가까이 하고 보니 몸의 일부로 안착한 느낌이라고 했다. 라인 작업을 하는 순간이 지금은 무념무상의 순간이 되었을 정도다. “연필 드로잉이 마음 수련 방식의 하나가 될 정도로 내 몸에 익었다. 이제는 치유의 행위다.”
그의 그림은 주관적인 감정과 반응을 표현하는 예술 사조인 표현주의를 취한다. 그런 탓에 이미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분위기는 흐릿하다. 흡사 안개에 흔들린 풍경이다. 구상이 지배적이지만 대상을 좁혀서 보면 또 추상이기도 하다. 구상과 추상을 아우르는 결정적인 역할은 역시 마지막 과정에 가해진 연필 드로잉에 있다.
“작업의 순서를 바꾸었을 뿐인데, 다양한 느낌들을 새롭게 얻을 수 있었다. 보여지는 대상도 새롭고, 그 속의 정서도 더욱 섬세해졌다.”
최근 그의 작업에 적지 않은 변화가 찾아왔다. 흐릿하던 풍경이 보다 또렷해지고, 풍경 속 대상도 크고 작은 나무나 풀들 대신 식물들을 그리기도 한다. “코로나 19로 혼자 있는 시간들이 더 많아지면서 주위의 식물들이 눈에 들어와서 작업으로 그려보고 있다.”
바탕색과 형상 사이에 은이나 금색으로 가하는 액션 페인팅을 추가한 것도 큰 변화다. 마지막 형상에 연필 드로잉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연필 드로잉이 전체적인 분위기에 방해가 될 경우 형상에서 작업이 마무리된다. “중간 과정에 금이나 은색이 마지막 형상 아래서 살짝 살짝 드러나고, 빛의 변화에 따라 드러나는 화면은 드라마틱함의 절정을 보여준다.”
풍경 속 이미지들의 붓 터치에 선의 느낌이 짙게 배어난다. 붓으로 형상을 그리지만, 작은 선들을 점처럼 찍은 점묘법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선이 절정에 달하는 지점은 연필 드로잉에서다. 선은 회화에서 점과 함께 조형의 가장 기본이 되는 구성요소인데, 신 작가는 가장 기본에서 새로운 가치들을 발견하는데 탁월성을 보여 왔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색채나 역순의 작업방식 채택도 외부보다 내부에서 찾은 결과였다. 어린시절의 놀이를 소환해서 역순의 작업방식을 도입하고, 자신의 신체적 한계인 시력보호 때문에 단색을 채택하고, 물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을 수용해 물가 풍경을 그리는 등 항상 자신 속에서 그림의 단초를 발견하고자 했다. 청년작가로서 다양한 매체에 눈길을 돌릴 법 하지만 전통매체인 회화를 고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가 “효율성”을 언급했다. “나는 멀리서 무언가를 찾지 않는다. 내가 가진 것을 활용해 최대의 효과를 만들려고 하는 스타일이다. 작업 방식이나 재료, 주제, 소재 모두 내 안에서 찾아 집요하게 파고든다.”
작가로서의 대명제를 “자신만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에 두고 10여년을 매진해 온 신경철이 미국에 진출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위치한 헬렌 제이 갤러리(HELEN J GALLERY)와 대구 리안갤러리와의 컬래버레이션으로 헬렌 제이 갤러리에서 개인전 ‘Evanescent Landscape)’전을 연다.
당초 지난해 2월이나 3월에 미팅을 하고 전시일정을 잡을 계획이었지만 코로나 19의 세계적인 팬데믹으로 미뤄졌다 올해 7월부터 전시 일정이 잡혔다. 이번 전시에는 150호부터 100호 사이즈 11점이 LA 시민들과 만나게 된다.
“미국에서의 첫 전시라 설렌다. 전통회화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나의 풍경 작품들을 보면서 많은 미국인들이 공감하고 위로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헬렌 제이 갤러리 전시는 10월 1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