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꿈
한여름 밤의 꿈
  • 여인호
  • 승인 2021.08.09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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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같이 짙은 밤하늘의 별들이 유난히도 선명하게 다가오는 한여름 밤입니다. 어지럽게 성가시던 날벌레들이 쑥 무더기에서 피어나는 벌레 퇴치향에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니 한결 한적하게 느껴집니다. 깊은 하늘에 점처럼 퍼져있던 희미한 별들이 하나둘 빛을 뿜어내기 시작합니다. 선명해지는 별을 따라 손 그림을 그리고 있자니 지나온 시절 행복했던 장면들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한 장 한 장 넘겨집니다.

오랜 진통으로 기진맥진할 때 배 위로 털썩 아기 핏덩이의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을 때, 바닥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며 간신히 얼굴을 들어 올려 처음으로 목을 가누었을 때, 성장이 더뎌 언제쯤 걸으려나 걱정하던 즈음 스스로 벽을 짚고 일어나 첫걸음을 떼었을 때, 분양받은 아파트 문짝을 샀다며 처음으로 장만한 집 계약서를 두 손 번쩍 들고 있는 남편을 보았을 때, 모든 사물을 길쭉하게 그린 유치원생 아들의 첫 작품을 만났을 때, 딸 아들이 원하던 학교에 입학하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을 때, 남편의 승진 소식을 들었을 때, 휠체어를 타신 시어머니와가족이 함께 여행 갔을 때, 친정어머니의 수술이 잘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동생들의 가정에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직장 동료의 결혼 소식과 생명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진돌이가 꼬물꼬물 첫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았을 때처럼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기억들이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그러나 그 많은 기억 속에 나로 인해 기뻤던 일도 분명 있었을 텐데 오로지 나로 인해 기뻐했던 기억은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족과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며 살진 않았지만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니 행복의 우선순위에서는 늘 자식과 남편, 부모, 형제, 동료들의 다음 순으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불현듯 밀려오는 이 미묘한 헛헛함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스스로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지 못했기에 밀려오는 씁쓸함 같은 것입니다. 평온한 일상에서 무심히 스쳐 가볍게 지나버렸을 분명 미미한 감정인데, 이렇게 자연에서 나만의 시간을 갖고 보니 괜스레 헛헛하게 스며옵니다.

하지만 이 감정의 모든 책임은 오로지 나에게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더 좋은 엄마, 더 좋은 아내, 더 좋은 며느리, 더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사느라 그들의 행복을 나의 기쁨으로 착각하며 살아온 연유입니다.

이제는 모두 제자리에서 제 할 몫을 감당하고 있으니 그들의 걱정은 접어두고 나로 인해 오로지 행복할 수 있는 뭔가를 하고 싶은데, 정작 무엇을 하고 싶은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동안 가족을 지키려는 의무감으로 나를 잊고 살아온 탓에 오로지 나를 위해 사는 법을 놓쳐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다른 이를 챙기는 시간만큼 나를 챙기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어쩌면 소진된 내 감정을 다시 충전하는 이 시간이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위한 새로운 기쁨이 될 것이라 스스로를 격려하며 가슴 뛰게 하는 일을 찾아 고심했던 풋풋한 그 시절에 꾸던 꿈을 이 한여름 밤에 다시 꾸어볼까 합니다.



배은희 도림초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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