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춤추는 조르바
[문화칼럼] 춤추는 조르바
  • 승인 2021.08.1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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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국 대구문화예술회관장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젊은 날 만났던, 실제 인물 조르바와 함께 지낸 시절의 자전적 이야기다. 소설속의 나(카잔차키스)는 붓다를 공부하고 글을 쓰며, 매일 매일 일어나는 욕망과의 싸움에서 이기고자 노력한다. 반면 항구에서 우연히 만난 조르바는 정 반대다. 둘이서 의기투합하여 함께 일하게 된 크레타 섬에서의 조르바는 거침없다. 카잔차키스에게 비친 그는 이렇다. "그는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카잔차키스는 자기 인생에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그리고 조르바를 꼽았다. 학교 문턱에도 제대로 못 가본 조르바를 말이다. 그에게서 '자유'의 가치를 배웠다. 그 유명한 카잔차키스의 묘비 글,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조르바는 글을 통한 지식은 없다. 오히려 주인(카잔차키스)더러 책을 그만 놓으라며, 자유를 얻으려면 당신에겐 무식이 필요하다고 소리친다. 그는 만고풍상을 겪으며 쌓은 지혜와 세상사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할 줄 아는 결단력으로 언제나 의기양양하다. 그리고 심지어 이별의 순간에도 어정쩡한 것은 참지 못한다. "지금 당장, 그냥 이렇게, 진짜 사나이라면 이렇게 딱 끊어 버리는 거요!" 이런 조르바를 두고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피가 뜨겁고 뼈가 단단한 사나이, 슬플 때는 진짜 눈물이 뺨을 흐른다. 기쁠 때면 형이상학의 채로 거르느라고 그 기쁨을 잡치는 법이 없었다."

조르바에게 있어서 춤은 언어이자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다. 그가 러시아에서 만난 친구와의 대화는 자꾸 끊긴다. 단어 몇 개로 대화를 시작하다 곧 "그만"이라고 외치곤 서로 춤을 춘다. 춤으로 자신의 생각, 살아온 이력 등을 표현하면 둘 다 완벽히 이해한다. "그 러시아 친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온몸의 말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얼마나 잘 알아들었는지! 맹한 친구였지만 내가 표현한 건 모조리 알아들었지요. 내 발, 내 손이 말을 했고, 내 머리카락, 내 옷도 말을 했지요." 무용의 본질을 이보다 더 적절히 표현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작가는 이 이야기에 지금껏 배운 것을 깡그리 지우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저 진정한 알파벳을 배우고 싶어 한다.

최근 대구문화예술회관과 경기아트센터 그리고 제주아트센터 이렇게 3공연장이 공동기획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 'The Object'라는 이름의 이 공연은 그 경계가 모호했다. 초연 후 '무용의 틀' 안에서 확대 재생산 될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원작자는 인간과 사물의 관계 재정립에 따른 '낯설게 하기'에 대한 의욕을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해하기 힘든 몸의 언어를 비틀기 까지 하니 원작자의 의도대로 대단히 낯설었다. 공연을 본 한 극장장의 말이 인상적이다. "이해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나 결국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이분이 상황파악에 대한 감을 매우 잘 잡는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반드시 모범답안이라 할 수 없지만, 어떻게 하면 이런 공연을 행복하게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사례들을 몇 차례에 걸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구, 수원 그리고 제주에서 차례대로 The Object 공연을 마친 후 작품에 대한 반응이 연령대에 따라 갈라짐을 알 수 있었다. 나처럼 연세가(?) 지긋한 분들은 대체로 "어렵다" 반면 젊은 층일수록 "너무 재미있다." 젊은 관객들은 "그냥 느꼈다,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받아들였다." 반면 우리들은 매사 이유가 있어야하고 설명이 되어야 한다. 특히나 의미가 있어야한다고 미리 선을 그어 놓는다. 그러니 The Object 같은 공연이나 빠른 전개의 작품은, 의미를 해석하려는 나의 속도를 추월하기에 어려워지는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말했으나 조르바로부터 부정 당한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이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조금 더 길 뿐이오. 그것뿐이오." 그리고 결국 고백한다. "나는 내 내부의 신성한 야만의 목소리를 따르지 않았다. 나는 조리에 닿지 않는 고상한 행위를 포기한 것이었다. 나는 정중하고 차가운 논리에 귀를 기울인 것이었다."

내가 결코 이런 '정중하고 차가운 논리'라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에 대하여 스스로 마음의 벽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어디 한 두 번 이었을까. 카잔차키스의 말, "예술이란 사실은 마법의 주문이다. 우리 내장에는 어두운 살상의 힘이, 죽이고 파괴하고 증오하고 능멸하려는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이 도사리고 있다. 그때 예술이 부드럽게 피리를 불며 나타나 우리를 이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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