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좋고 물 좋고 기후 좋고…한반도, 인삼 많은 이유 있었네
땅 좋고 물 좋고 기후 좋고…한반도, 인삼 많은 이유 있었네
  • 김종현
  • 승인 2021.08.2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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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식 세계로> - (29) 백두산 산신령 단군이 내린 산삼
인삼 재배 최적지
연간 평균 기온 9~13.8℃ 서늘
강우량 700~2000㎜ 적당한 조건
산성도 6.0의 칼륨 풍부한 토양
“심봤다”고 하는 이유
산약 가운데 가장 진기한 약초 ‘산삼’
영물이기에 눈 뒤집혀 사람도 해칠까
목청껏 소리질러 모두의 시선 집중
한반도산삼
두 뿌리 산삼이 서로를 베고 누워있는 한반도. 그림 이대영

2021년 2월 28일 중화텔레비전에서 방영한 ‘금심사옥(錦心似玉, The Sword and The Brocade, 2021.2.26.~4.6)’ 총 45회 가운데 제9회 화면에서 서령이와 뤼십일량과의 대화를 보자.

“후작님, 이건 삼계탕이잖아(候爺, 這碗蔘鷄湯)”라는 서령이 말에, “이건 평범한 음식이 아니에요(可不簡單). 이 그릇 안 인삼은(這碗里的蔘) 백년 묵은 산삼이지요(是百年蔘).”라고 서두를 끄냈다. “이건 말하자면, 저의 오라버님이 백두산에 가 행상을 하실 때(是我的大哥去長白山, 行商的時候). 은자 30량을 주고 산 것이지요(三十兩銀子購得的).”라고 뤼십일량이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두고 중국인들은 삼계탕이 중국전통음식이라고, 한국이 중국전통삼계탕까지 훔쳐갔다고 야단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이젠 김치전쟁(韓中泡菜戰爭), 한복전쟁(韓服戰爭)에 이어 삼계탕전쟁(蔘鷄湯戰爭)까지 치르게 되었다. 동일선상에서 중국 텐센트사가 국내 모 공영방송국에서 320억 원 들여 제작한 ‘조선구마사(朝鮮驅魔師)’를 상영하다가 한국전통문화와 관련성이 전혀 없는 중국소품을 마련해 방영했다. 또한 극중 대사에서도 주변속국 문화예속화라는 동북공정 음모의 마각이 숨어있는 말을 했다는 비난을 샀다.

사실, 한반도에 인삼이 자생한 천연조건은 i) 지구상 위도와 경도에서 북반도 극동에 위치하고 있어 ii) 평균기온이 연간 9~ 13.8 ℃이고 여름에도 20~ 25℃, 강우량 700~2,000mm이며, 강설량이 비교적 적은 기후적 조건을 갖췄다. iii) 반음반양(半陰半陽)의 인삼 자생조건에 최적이고 사계절로 인한 직사광선이 강렬하지 않아 최적성장 조건까지 갖췄다. iv) 토양에 칼륨 성분이 풍부하고, 겉흙이 사질양토(沙質壤土)에다가 산성도(PH)가 5.5~6.0 정도의 오염되지 않은 숙전(熟田)까지 구비했다. v) 지형상 북쪽과 동북쪽으로 8~15°정도 경사진 곳으로 배수가 잘되었다. vi) 한반도는 고려시대까지 박달나무, 산 벚나무(山櫻花), 자작나무(白樺樹), 벽오동, 후박나무, 느티나무, 누릅나무, 생강나무, 이팝나무 등으로 활엽수가 산야를 다 덮었다. 따라서 백두산을 경계로 한반도 전체가 인삼재배에 지구상 최적지였다.

한마디로 한반도는 심마니의 눈으론 ‘두 뿌리 산삼이 서로를 베고 누워있는 형국(二根蔘地形)’이다. 동고서저에다가 북고남저(東高西低北高南低)지형으로 장백산맥(백두산)이 하나의 산삼이고, 백두산을 노두로 태백산맥까지 뻗어 내린 한 뿌리 산삼에 지리산까지 뿌리를 내렸다. 이런 사실을 간파했던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영조 때 ‘산경표(山經表)’라는 저서에서 이를 인체의 척추와 경맥으로 표시했다. BC 4세기경 작자미상의 산해경(山海經)에서는 한반도(靑丘)를 두고 “이곳(한반도)은 기름기가 조르르 흐르는 콩, 쌀, 기장(수수 혹은 조), 피 등의 오곡백과가 풍성하게 자라, 봄, 여름 및 가을에도 파종을 한다. 채란신조(彩鸞神鳥)들이 재잘재잘 노래하며, 봉황새도 넘실넘실 춤을 춘다. 신이 준 수명(靈壽)을 다해 열매를 맺고, 온갖 초목들이 군락을 이뤄 울울창창한 곳이다. 온갖 동물들이 서로 짝을 지어 사랑하며 살아간다. 온갖 화초들은 여름이고 겨울이고 끊어지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어릴 때에 시골 형님들을 따라 산속 약초를 캐려가는 걸 ‘산약(山藥)을 간다’고 했다. 평소에 어머니 혹은 아버지로부터 약초에 대해 익혀놓았던 실력을 발휘하는 기회였다. 기억나는 것으로는 칡뿌리(葛根), 개다래 열매(木天蓼子), 개똥 쑥(黃花蒿), 겨우살이(桑奇生), 계피(桂皮), 너삼(苦蔘), 구기자(枸杞子), 구절초(九節草), 구지 뽕, 까마중(龍葵), 달맞이 꽃씨(月迎子), 담쟁이 덩굴(常春藤), 대추, 더덕(沙蔘), 도꼬마리(蒼耳子), 도라지(桔梗), 돼지감자(菊芋), 둥굴레(豆應仇羅), 마가목(馬家木), 맥문동, 모과(木모果), 민들레((蒲公英), 박하(夜息香), 밤 껍질(栗皮), 백출(白朮), 뱀 딸기, 버드나무(楊柳), 솔복령(松茯笭), 산딸기(覆盆子), 뽕(白桑皮), 산수유(山茱萸), 생강(生薑), 석창포(石菖蒲), 소태나무(苦樹皮), 쇠무릎(牛膝), 쇠비름(馬齒?), 수수(蜀黍), 시호(柴胡), 목련꽃(辛夷花), 아기똥풀(白屈菜), 하수오(何首烏), 녹차잎(茶葉), 엄나무(嚴木), 엉겅퀴, 연잎(蓮子), 오가피(五加皮), 오리나무(楡理木), 오미자(五味子), 붉나무(五倍子), 옥수수 수염(玉米鬚髥, corn silk), 옻나무(乾漆皮), 와송(瓦松), 우엉(牛蒡), 익모초(益母草), 은행열매(杏仁), 인동덩굴(忍冬草), 인진쑥((茵陳艾), 자귀나무껍질(合歡皮), 조릿대(竹葉), 잔대(沙蔘), 곶감, 탱자(枳皮), 질경이(車前草), 치자(梔子), 망개(土茯笭), 하고초(夏苦草), 하늘수박(天瓜), 할미꽃(白頭翁, 老姑草), 함초(鹹草), , 헛개(枝具子), 화살나무(鬼箭羽) 등이 있었다.

◇신라부터 지금까지 산삼에 한해 “심봤다”고

다양한 산약(山藥) 가운데 가장 진기한 약초는 산삼(山蔘)이었다. 산신령님이 점지해주어야 채취할 수 있다고 어른들로부터 들어왔다. 산삼을 캐고자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산신령님께 100일 기도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약초꾼 혹은 심마니는 입산고사(入山告祀)를 지냈고, 산에서 밥을 한 술 먹을 때도 산천초목에게 먼저 ‘고시네(고수레)’를 두려 나눠주었다. “심봤다.”고 목청껏 소리를 크게 지르는 이유는 i) 산삼은 영물(靈物)이기에 큰소리를 내어 그 자리에 덥석 주저앉게 한다는 의미, ii) 다른 심마니들에게 영물을 보고 눈이 뒤집혀 사람까지 해칠(죽일) 수 있음에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킴에 있다. 여기서 ‘심(心)’이란 산삼이다. 심을 캐도록 하는 사람이 심마니((wild-ginseng digger)이고 심봤다는 감탄사를 외치는 사람이다.

삼(蔘 혹은 麻)이란 야생초인 새삼(love vine, 鳥麻), 삼(大麻), 갈삼(葛麻), 한삼 등의 껍질을 벗겨서 노끈이나 직물을 만들 수 있는 초목을 삼(麻)이라고 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삼(蔘, ginseng)’이라고 하는 약초는 신라시대에선 심(心) 혹은, 침(侵)으로 하다가 중국한자의 영향으로 삼(參→蔘)으로 표기했다. 고려시대부터 삼(蔘)이라고 분명하게 규정했다. 고려 고종 때 1263년 관찬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서는 향토약초 147개에 대한 질환에 처방을 내었다. 여기에 고삼(苦蔘)과 현삼(玄蔘)이 나온다. 당시는 인삼(人蔘), 고삼(苦蔘, 속명 너삼), 만삼(蔓蔘, 속명 더덕), 사삼(沙蔘, 속명 잔대), 현삼(玄蔘, 속명 심회초) 혹은 단삼(丹蔘, 속명 분마초)이라고 분류했다.

1489(조선 성종20)년에 왕명으로 편찬된 ‘구급간이방언해(救急簡易方諺解)’에 인삼(人蔘)이라는 한자를 언해하여심(心)으로 풀이했다. 1610년 허준(許浚, 1539~1615)이 어명으로 저술한 ‘동의보감(東醫寶鑑)’ ‘인삼조(人蔘條)’에 인삼(人蔘) 아래 ‘심’이라는 주석까지 달았다. 또한 1799(정조23)년에 왕명으로 간행한 ‘제중신편(濟衆新編)’과 1884(고종21)년에 간행된 ‘방약합편(方藥合編)’에서 시골이름(鄕名) ‘심(鄕名云心)’이라고 기록했다. 신라시대부터 “산삼 봤다.”고 외치기보다 은유적이고 완곡한 표현인 “심봤다.”고 외쳐왔다. 1820년 한글학자 유희(柳僖, 1773~1837)가 저술한 ‘물명고(物名攷)’에서도 ‘심’이라고 적고 있다.

◇동양고문헌에서 인삼

삼(蔘)에 대한 중국한자를 살펴보면,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나무가 곧고 길게 자라는 모습에다가 삼(參)의 음을 따왔다”고 설명했다. BC 600년 이전의 시가집이었던 시경(詩經)에서 “이리저리 올망졸망 찾아다님” 당시는 ‘삼(參)’자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삼(蔘)’은 이후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마천(司馬遷, BC 145~ BC 86)의 ‘사기(史記)’ 사마상여전에 “곧게 쑥 성장한 용모, 바람을 휘감을 기풍”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삼(參)은 인삼(人蔘)이 아닌 ‘곧고 길게 성장하는 모습’을 의미했다.

인삼이란 약(藥)으로 삼(參)자를 사용한 사례는 송나라 심괄(沈括, 1031~1095)의 ‘몽계필담(夢溪筆談)’에서 “왕형공(王荊公)이 천식이란 병을 얻었는데 산서성(山西省)의 자단산 인삼을 써야 하는데 구할 길이 막연하다”라는 기록이 있었다.

그 이름이 인삼(人參)이라고 한 것은 풍가(風茄)의 겉모양이 사람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 약효는 모든 약초 가운데 최고였다. ‘동북삼보(東北三寶)’로 인삼(人蔘), 초피(貂皮), 녹용(鹿茸) 가운데 제일보(第一寶)였다. 특히 고려삼(高麗參)은 조선반도에서 생산되는 인삼이며, 중국에선 “고려인삼 한 뿌리는 보석 한 꾸러미와 같다.”고 했다.

중국에서 인삼의 역사는 명말(明末)에 인삼이 대인기(熱)였기에, 여진족들이 중원시장에 진출해 인삼을 판매했다. 만력 37(1607)년 이때까지 중원에서 야생인삼을 한 번 보기가 어려웠다. 청나라에 들어와서 매년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장백산(백두산)에 삼을 캐러 갔으며, 강희38(1699)년에 조정에서는 사적인 채집을 금지시켰다.

글·그림 = 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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