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호 경영칼럼] ‘런(run)’과 시나리오 경영
[박명호 경영칼럼] ‘런(run)’과 시나리오 경영
  • 승인 2021.08.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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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호 계명대학교 석좌교수, 전 계명문화대학교 총장
‘걷지 말고, 뛰세요!’체력단련구호처럼 들리는 이 말은 수년 전 중국의 한 대도시에서 횡단보도를 건널 때 우물쭈물하던 내게 중국의 지인이 소리친 말이다. 신호등만 믿고 길을 건너다가 혼쭐이 났다. 그의 조언처럼, 운전자나 보행자 어느 누구도 교통신호를 지키지 않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방법을 제대로 터득해야 비로소 이곳에 살 자격이 있다”는 우스개도 들었다.

미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걷지 말라’는 표시로 바뀔 때 성미가 급한 교포들이 뛰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횡단보도 신호등은 ‘걸어가세요(Walk)’와 ‘걷지 마세요(Do Not Walk)’의 두 가지로 표시되는데, ‘뛰거나 달리는 것’은 ‘걷는 것’이 아니니 당연히 교통신호 위반이 아니라는 농담도 들었다. 하지만 대도시 횡단보도에서는 여전히 뛰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뛰고, 달리라’는 ‘런(run)’이 유행이다. 여러 가지 ‘런’이 등장했다. 코로나가 초기 유행했던 지난해에는 마스크를 먼저 사려고 약국으로 내 달리는 ‘마스크런(mask run)’이 나타났다. 명품구매를 위해 밤샘 줄서기를 하다가 백화점 문이 열리자마자 매장으로 우르르 내달리는 ‘오픈런(open run)’도 자주 본다. 며칠 전에는 ‘머지포인트’로부터 환불을 바라는 소비자들이 회사로 몰려드는 ‘머지런(merge run)’이 터졌다. 은행 예금인출사태를 뜻하는 ‘뱅크런(bank run)’도 있다.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비행기를 타려고 수천 명이 공항으로 내닫는 ‘공항런(airport run)’도 발생했다.

아프간에서처럼 생사의 기로에서 위기를 탈출하려면 당연히 악착같이 뛰고 달려야 한다. 하지만 목숨 걸 일이 아닌데도 정신없이 내달리는 것은 좋지 않다. 뛰고 달릴 때는 아무 생각을 할 수 없고, 방향 감각마저 상실할 수 있으며, 자칫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뛰기(run)’보다는‘걷기(walk)’가 좋다. 자신의 힘에 알맞은 속도로 걸으면 건강해진다. 또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 올리거나 당면한 문제에 올바른 해결책을 찾아낼 수도 있다.

소요학파(逍遙學派)로도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학파는 이름 그대로 ‘걷기’를 좋아했다. 고전문학의 대가인 에디스 홀은 ‘열 번의 산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 그리고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처럼 걸어 다니면서 생각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전통을 정면으로 반박한 프리드리히 니체도 ‘모든 가치 있는 생각은 걸을 때에만 얻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스어에서 ‘걷기’는 ‘살기’와 유의어(類義語)다. 제대로 살아가려면 걸어야 한다.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기업의 CEO들에게도‘사색’을 위한 ‘걷기’가 필요하다. 예측 불가능한 비즈니스 환경에 대응하고 고객의 엄청난 이동속도를 맞추는 동시에 경쟁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색과 민첩한 행동이 요구된다. 그래서 요즘 ‘애자일(agile) 경영’이나 ‘시나리오 경영’ 또 ‘비상경영’등이 강조된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행동’이전에 ‘사색’이 필수다. 무엇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서는 대처 가능한 행동방안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경영’은 불확실성이 높은 미래 경영환경에서 기업이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는데 매우 요긴한 방식이다. 여러 가지 시나리오에 따른 전략안을 미리 만들어 두고 그 가운데 주어진 상황에 가장 적절한 대응전략을 민첩하게 채택하여 상황의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다. 지금은 단순한 추측이나 추정에 의해 한 가지 방안을 예견하는 전통적인 미래예측기법에서 벗어나야만 생존이 가능한 시대다.

미국의 아프간 철수작전이 미국 국민은 물론이고 세계인들로부터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다양한 시나리오를 철저히 준비하지 않고 조급히 작전을 실행함으로써 심각한 부작용과 문제점들을 드러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에게 극심한 좌절감을 안겨주고 있다. 반세기 전 앨빈 토플러가 ‘미래의 충격’에서 예견한대로 우리는 이미 ‘좌절의 세상’에 살고 있다. 변화의 불확실성과 엄청난 속도가 가져다주는 좌절감을 극복하려면 누구라도 여러 개의 시나리오를 사전에 면밀히 검토해야만 한다.

‘시나리오 플래닝’의 대가인 피터 슈워츠는 911테러가 일어나기 7개월 전 워싱턴-뉴욕의 주요 건물에 대한 대대적인 테러공습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보고서를 부시 행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당시 부시대통령을 비롯한 각료들은 이 시나리오를 가볍게 여기고 무시해 버렸다고 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오류’에 사로잡힌 결과다. 지금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어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생전에 강조했던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말이 절실히 다가오는 요즘이다. 우리 모두 제발 뛰지 말고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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