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맛
손맛
  • 승인 2021.09.12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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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입맛은 변해도 손맛은 지문처럼 변하지 않는다.

몇 통의 부재중 전화가 나를 애타게 올려다본다. 메밀묵 할매가 보낸 신호다. 메밀묵을 쑤었다며 먹으러 오라는 전화였을 테다. 할머니의 메밀묵 쑤는 솜씨는 따라갈 자가 거의 없다. 메밀묵과 함께 곁들여져 나오는 양념장은 또 어떤가. 잘 숙성된 조선간장에 듬성듬성 썰어 넣은 아삭아삭한 햇양파, 그리고 국산 참기름 맛의 조화는 일품이다. 다른 곳에선 찾아보기 힘든 진한 고소함이 있다. 할머니가 손수 빚은 농주 또한 그러하다. 할머니만의 손맛이 걸쭉하게 담겨 있다. 메밀묵에 농주 한 잔이면 그 어떤 시름도 다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그런 메밀묵을 생각하니 입 안 가득 침이 고여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나는 내내 망설이고 있었다. 몇 달 전, 그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 같았으면 오늘처럼 할머니의 전화가 오기도 전에 내가 먼저 묵을 쑤었는지, 언제 쑬 건지 할머니를 채근하며 귀찮게 했을 터였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할머니의 메밀묵처럼 청국장을 구하기 위해 찾아가는 집이 있다. 직접 농사지은 국산 콩으로 가마솥에 정성껏 띄운 청국장을 파는 곳이다. 그날도 그랬다. 맛이 깊고 끓여 놓으면 수입 콩으로 띄운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며 주변의 지인들 것까지 주문을 받아 청국장을 사기 위해 먼 길을 달려갔다. 그곳에 막상 도착하니 청국장 할머니는 보이지 않고 메밀묵 할머니가 청국장 좌판을 지키고 있었다.

“청국장 파는 할머닌 어디 가셨나 봐요.”라고 묻자 살 것이 있어 장에 갔다며 자신에게 주문을 넣고 가면 대신 전해주겠다는 것이다. 며칠 뒤 메밀묵 할머니로부터 청국장을 찾으러 오라는 전화가 왔다. 청국장을 찾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청국장을 끓였지만 원래 내가 아는 그 맛이 아니었다. 거무튀튀한 색이며 걸쭉하고 깊은 맛이 나지 않았다. 내 입맛이 변한 것인지 의문이 들어 지인에게 전화를 넣었더니 그녀도 ‘청국장 맛이 왜 이렀냐!’ 며 도로 물리고 싶다는 것이다.

메밀묵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청국장 색깔도 그렇고 구수한 맛보다는 오히려 쓴맛이 더 나는데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늘 하던 대로 끓였는데….” “멸치를 잘못 쓴 거 아이가. 똥은 뺏나….”

이것저것 물어보는 질문들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할머니에게 더는 되묻지 않았다. 다신 할머니를 찾지 않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영 번과 한 번 사이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다. 계절이 바뀔 때라든가, 해가 바뀌거나 달이 바뀔 때, 옷을 정리하다 말고 한 번 쯤 고민에 빠질 때가 있다. ‘일단 꺼내놓긴 했지만 이번엔 입게 될까’와 ‘그냥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의 사이처럼 할머니와의 인연도 그랬다. 막상 번호를 지우기엔 주저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울 때 지우더라도 안부라도 한 번 물어보고 지우고 싶은 사람 또한 있는 것처럼 메밀묵 할머니의 전화번호는 내내 지우지 않은 채 간직하고 있던 터였다.

사람의 머리로는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를 시간은 가끔 해결해 주는 수가 있다. 지금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 할지라도 우선 하룻밤 푹 자고 나서 다음 날 다시 생각해 보면 실마리가 풀리기도 한다.

“할머닌 전화번호 입력란에 저를 뭐라고 적어 두셨어요?” 오랜만에 다시 찾게 된 할머니에게 물었다. “궁금하나. 청국장 새댁이라고 써 놨다 와” “와, 저도 그런데. 청국장 할머니라고 입력해 놨거든요”

나 역시 그렇다며 맞장구를 치며 할머니와 나는 마당이 들썩이도록 손뼉을 치며 웃었다. 할머니에게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을뿐더러 허리가 아파 더는 묵을 쑬 수가 없다며 마지막으로 나를 초대 해 먹이고 싶었다는 것이다. “할머니 표 메밀묵과 농주 맛의 비결이 뭘까요.” “인자 내가 살믄 얼마나 살끼라꼬. 가짜 참기름 넣은 거 팔아서 머하겠노. 이문이 없어도 진짜 참기름 넣어 줘야지. 근데 참기름만 넣는다꼬 그 맛이 나오는 줄 아나. 깨소금도 같이 넣어야 한데이. 내가 깨소금 볶는데 얼마나 정성을 쏟는 줄 아나, 덜 볶아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태워서도 안 되는기라.”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 마당에 살폰 내려놓고 뒤돌아오는 길, 서녘 하늘에 핀 노을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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