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온의 민화이야기] 흔들리는 나무·붉게 물든 잎…붓 들게 만드는 가을
[박승온의 민화이야기] 흔들리는 나무·붉게 물든 잎…붓 들게 만드는 가을
  • 윤덕우
  • 승인 2021.09.22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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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 소리에 잠 못 이루고, 단풍나무 아래서 수레를 멈추다
김홍도 1805년작 ‘추성부도’
송나라 구양수 수필 모티브
위에서 풍경을 내려다보듯
“가을소리 기막히게 담았다”
손으로 그린 지두화법 특징

이제 가을이 시작한다. 매번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 할까... 고민스럽지만 그 덕분에 내 일상을, 내 주변을 더 살펴보게 되었다.

며칠 전 우연히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쨍쨍하던 햇빛이 달라졌고, 싱싱했던 가로수 잎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밤마다 우는 풀벌레 소리도 달라졌다.

계절이 바뀌고 있구나.. 자연의 색이 변하겠구나. 그리고 스산한 바람에 나뭇잎이 다 사라지겠구나 싶어 살짝 서글픈 생각도 들었다.

계절의 변화에 대한 생각을 단원 김홍도도 했었나 보다. 보물 1393호로 지정된 〈추성부도(秋聲賦圖)〉는 중국 송나라 구양수(1007~1072)의 수필(賦), <추성부(秋聲賦)>를 그림으로 표현한 김홍도의 만년작이다. 그림 왼쪽에는 ‘추성부’ 전문이 적혀있으며, 끝부분에는 ‘을축년 동지 후 삼일, 단구(丹邱)가 베껴쓰다’라고 기록해놓았다. 단구는 김홍도 호(號) 중의 하나다. 을축년은 1805년이며, 작품을 제작한 시기는 그가 죽기 전해의 겨울로 본다.

이 그림은 올해 4월 국가 기증으로 내놓은 이건희컬렉션 중에서, 무가지보(無價之寶,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로운 것)로 꼽히는 작품으로 유명해졌다.

화면 중앙엔 집 한 채가 보인다. 중국풍의 초가집이다. 그 옆에 이어진 집 하나가 언덕 아래쪽으로 들어가 살짝 감춰져 있다. 넓지 않은 마당이 펼쳐져 있고 마당의 끝에서 왼쪽으로는 바위 언덕이 또 하나 솟아있어서 전체적으로 건물을 포옥 감싸고 있는 풍경을 부감(내려다보기)하듯 그렸다. 집을 둘러싼 나무들은 잎이 떨어져 앙상해져 있고 바람에 흔들리는 듯 동세(動勢)가 느껴진다. 왼쪽 언덕 위엔 또 다른 초가집이 하나 보이고 그 위로 둥근 달이 떠 있다. 둥그런 달 창을 사이로 두고 밖에 서 있는 동자가 팔을 펼쳐 안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뭔가를 얘기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이 남자가 책을 읽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렸던가 보다. 처음에는 빗소리가 나다가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폭풍우가 쏟아지는 듯하다가 쇠붙이들이 한꺼번에 울리는 소리가 나자 동자를 불러 나가보라고 했다. 돌아온 동자는 “별과 달이 밝고 하늘에는 은하수가 걸려 있어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소리 들은 나무숲에서 나고 있어요.”라고 한다.

그렇게 밖에서 들리는 소리는 그저 가을의 소리일 뿐이다. 집 주변 나무에는 가랑잎 몇 개만 달려 있을 뿐, 구양수는 이러한 정서를 ‘추성부’에 고스란히 담아냈습니다. 단원의 <추성부도(秋聲賦圖)> 그림은 가을 소리를 기가 막히게 그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군데군데 지두화법(指頭畵法) 곧 손가락 끝으로 그려 꼿꼿한 필치가 보이고, 불규칙하게 꺾인 나뭇가지가 몇 개로 정돈되어 단원 말년의 쓸쓸함을 가을 소리에 담아내고 있는 듯하다.
 

추성부도-김홍도
김홍도 작 추성부도(秋聲賦圖)보물 제1393호, 1805년 제작, 견본수묵담채. 214 x 56 cm, 리움미술관 소장.

안중식 ‘풍림정거도’
두목 詩 ‘산행’ 구절 시각화
쌀쌀한 분위기는 은색으로
구름·안개로 산 사이 장식

가을바람 소리를 들었으니 이제 가을의 풍광을 구경하러 가 보자.

안중식의 <풍림정거도(楓林停車圖)>를 소개한다.
 

풍림정거-안중식
안중식작 ‘풍림정거(楓林停車)’ 1913년. 164.4 × 70.4㎝. 견본채색. 리움미술관 소장.

안중식(安中植·1861~1919)의 ‘풍림정거(楓林停車)’는 온 산에 서리가 내려 은색으로 변할 즈음 산에 오른 선비가 수레를 멈추고 앉아 단풍을 구경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안중식은 단풍나무의 붉은색이 두드러져 보이도록 바탕에 은색으로 깔았다. 은색은 단풍을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서리 내린 가을 산의 냉기를 전해준다.

‘풍림정거(楓林停車)’는 당대(唐代)의 시인 두목(杜牧·803~852)의 시 ‘산행(山行)’에서 따온 구절이다.

‘멀리 늦가을 산에 오르니 돌길 비껴있고(遠上寒山石徑斜)/ 흰 구름 이는 곳에 몇 채의 인가(白雲生處有人家)/ 수레를 멈추고 앉아 늦은 단풍을 구경하나니(停車坐愛楓林晩)/ 서리 맞은 단풍잎 이월의 꽃보다 더 붉네(霜葉紅於二月花)’

차가운 산, 돌길을 오른다는 표현에서 쌀쌀해진 가을의 기운을 느낄 수 있고, 흰 구름 깊은 곳이라는 표현에서 꽤 높이 산을 올라 인적이 드문 곳까지 이르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가을이 깊은데 산을 높이 올랐으니 단풍은 더욱 선명하고 화려한 색의 향연을 연출했으리라 여겨진다. 가을 단풍이 꽃보다 더 붉은 연유이다.

선비와 시동들의 시선이 똑같은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은 두목의 시 ‘산행’ 중에서 “수레를 멈추고 앉아 저녁 햇빛에 비친 단풍 숲을 감상하니, 서리 맞은 단풍잎이 2월의 꽃보다 더 붉네 (停車坐愛楓林晩, 霜葉紅於二月花).”라는 구절을 시각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때 인물의 시선이 멈춘 곳은 단풍나무 숲이며, 이러한 장면은 같은 주제의 회화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도상 표현이다. 인물들 뒤로는 각이 심한 산들이 고원법(高遠法)으로 배치되어 있고, 산 사이에는 구름과 안개가 장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가을만 되면 천지를 붉게 물들이는 단풍의 불길은 잿빛 나뭇가지가 앙상하게 드러날 때까지 탈 대로 다 타고 낙화한다. 낙엽은 눈비 속에서 분해된다. 낙엽은 찬란했던 단풍의 추억을 가차 없이 뒤로 한 채 바스라지고 눅진해져 거름으로 돌아간다.

형체가 변했다 하여 사라진 것이 아니다. 낙엽의 화신인 거름은 땅을 살리고 미생물을 키우면서 겨울을 보낸 후 이듬해 봄에 다시 제 몸속으로 들어가 연둣빛 잎사귀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꽃봉오리로 혈혈하게 피어난다. 생명의 부활을 위한 자연의 순환은 죽음조차도 아름답다.

가을은 결실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계절이다. 결실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봄에서 여름을 지나 가을에 결실을 맺기까지 기막힌 사건을 겪어야 한다. 꽃샘추위부터 시작해서 늦여름, 초가을의 태풍까지 견뎌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낙엽이 꽃이라면,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Autumn is a second spring when every leaf is a flower)’라고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엘리엇 부(Eliot Bu)의 ‘자살을 할까 커피나 한 잔 할까’ 중에서) 카뮈의 글을 읽는 순간, 예술가는 동서양이 따로 없이 생각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두목(杜牧)이 단풍을 봄꽃에 비유함으로써 그 진한 단풍색을 선명하게 떠오르도록 했다면 까뮈는 여기서 더 나아가 가을을 봄이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첫 번째 봄이 아니라 두 번째 봄이다. 서툴고 막막함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꽃을 피워내야 하는 첫 번째 봄이 아니라 경험이 있어 한결 느긋하고 여유로운 두 번째 봄이다.

가을 단풍잎은 비록 봄에 피는 꽃같이 부드럽고 고운 꽃잎은 아니지만 여러 계절을 견디면서 축적된 시간이 들어 있다. 퍼석하고 윤기 없는 잎을 지녔지만 가을의 봄꽃은 여러 계절을 보내면서 배운 지혜로 물든 색이다.
 

화조도1
작가미상 화조도 20세기 초 견본채색 88 X 34cm 민화본색 소장.

작가 미상 ‘화조도’
메추라기·국화·단풍나무 배치
화목한 가정 ‘안거락업’ 염원

민화 화조도에서는 어쩌면 두 번째 봄을 핑크빛 단풍잎으로 표현한 여유로운 일상을 만날 수 있다. 이 그림의 주제는 안거락업(安居樂業)이다. 집안이 단란하게 모여 살며 화목한 것을 기리는 그림이다. 메추라기에 국화(菊花)와 단풍나무를 배치한 그림으로 도안을 구성한다.

이제 시간이 조금만 더 흘러가면 가을 햇살에 투명하게 빛나는 붉은 단풍나무잎이 아름다워 질 것이다. 가을 단풍나무의 아름다운 빛깔은 동아시아의 문인들에게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에 단풍나무와 관련된 많은 시들이 나올 수 있었다.

흔히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했는데.. 옛 선인들의 시도 읊조리고 그 느낌을 그림으로도 표현해 보리라.

이번 주말에는 배낭 메고 뒷산에라도 다녀와야겠다.

박승온ㆍ사단법인 한국현대민화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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