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쳇소리
라쳇소리
  • 승인 2021.09.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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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마당 가, 감나무의 감이 익어갈수록 가을이 깊어간다. 바람과 햇살이 더해질수록 딱딱하던 육질이 말랑말랑해지고 떫기만 하던 과즙은 달콤한 홍시로 거듭난다. 우리 앞에 주어진 가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결실의 계절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조락의 계절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추석 연휴를 기점으로 사람 간의 접촉이 늘어나고 이동량이 증가함에 따라 코로나 19 신규 확진자가 역대 최다를 갱신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다. 향후 최소 2주간은 사적 모임을 취소하거나 연기하고, 마스크 착용이 어려운 다중이용 시설의 방문은 자제해 달라는 당부도 곁들여진다.

일상회복의 고지에 다다른 듯싶더니만 기대한 만큼 더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확산세가 오르기만 하고 내리지는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일상과 상상 사이의 조율이 필요한 듯 보인다. 일상을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천국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할 테니 말이다.

얼마 전, 지인 한 분이 확진자와 밀접접촉자가 되는 바람에 2주간 격리된 적이 있다. 남편과 아이들을 가까운 친척 집으로 보내놓고 혼자 집안에 남았다고 한다. 깊은 어둠 속,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배처럼 처음 며칠은 무섭고 두려운 맘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한다. 쉼 없이 달려온 삶 속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실컷 잠이나 자 봤으면' 꿈꾸었는데 막상 2주일이라는 격리의 시간을 받아놓고 보니 밀린 잠은커녕 뭘 해야 할지,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독방에 갇힌 것처럼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지나간 드라마를 몰아보기 하거나 넋 놓고 멍하니 앉아있는 일 말고는.

자전거를 탈 때, 페달을 밟다가 페달질을 멈춰도 자전거 바퀴는 굴러간다. 그때 자전거 뒷바퀴에서 차랑 소리처럼 촤르르르 하는 소리가 나게 되는데 그 소리를 '라쳇소리'라고 한다. 더는 힘을 주어 밟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달려온 힘에 기대어 혼자서도 잘 가고 있다는 속도의 신호다. 한시름 놓아도 된다는 위로와 잘 견뎌 냈다는 격려의 소리로 들려 언제 들어도 좋다.

라쳇소리가 들려올 때쯤이면 안장 위 사람들은 땀을 닦거나 가쁜 숨을 돌린다. 바람을 느끼기도 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주변 풍경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나아갈 길을 재정비 한다.

며칠을 무의미하게 낭비하고 보니 어느 날 문득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생각을 바꿔먹기로 했다는 것이다. 남편들이 말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은 아내가 해 주는 밥인 반면, 아내들이 말하는 가장 맛있는 밥은 누군가 해 주는 밥이듯 비록 '구호 물품'이라 해도 챙겨 주는 밥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무엇보다 기뻤다고 한다. 챙겨주고 신경 써야 할 가족이 곁에 없으니 오롯이 자신에게만 몰두할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 밀린 책을 보기도 하고 밀쳐두었던 집 안 구석구석 방방이, 주방의 그릇이며 장롱 속 계절 지난 옷, 가지치기 등등 작정하고 대청소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동계시즌 로드자전거나 자동차, 비행기나 선박 등 가고서는 모든 기계를 분해정비(오버홀)하듯, 집안을 쓸고 닦고 기름칠했다고 한다. 환경을 바꾸고 먼지를 걷어내고 나니 안개속인 듯 불안하고 두려웠던 마음이 저절로 걷히더라는 것이다.

'느린 것을 두려워 말고 다만 멈추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불파만(不?慢), 지파참(只?站)의 중국 속담이 기억난다. 삶이 언제나 그렇듯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가장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빠를 때가 아닐까. 우리네 삶의 다양한 풍경처럼 핑계 없는 무덤 없듯,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해 본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는 구월 어느 날, 2주간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그녀가 코스모스 같은 미소를 지으며 하던 말이 떠오른다.

"가을 역에서 우연처럼 만난 격리의 시간이 묵은 때를 불리고 벗어 던질 수 있는 필연의 시간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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