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온의 민화이야기] 국화, 墨으로 고매하게… 色으로 강렬하게…
[박승온의 민화이야기] 국화, 墨으로 고매하게… 色으로 강렬하게…
  • 윤덕우
  • 승인 2021.10.06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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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화가들에겐 인격 도야·수양의 소재
대나무 등 유교적 상징 곁들여 품격 강조
문방구·새·나비와 조합…화목·장수·평안 기원
책가도와 결합한 병풍 제작, 장식적 성격 뚜렷
바야흐로 10월, 마지막 늦더위마저 물러가고 나면 본격적 가을, 이제 국화의 계절이 온다. 청명한 계절에 접어들며 소싯적 외웠던 시 구절 한 줌 꺼내어 가을을 즐겨 본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밤 세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 시인의 대표적인 시 가을이 되면 시 낭송의 단골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연히 청도 대감사 설우 스님의 화엄경 설법을 듣는 중에 이 시를 인용하면서 국화 꽃 안에는 천둥도 들어있고, 먹구름에 소쩍새의 울음도 들어 있어 그 인과법으로 청초하게 피었다는 해석을 하셨다. 국화꽃에 그렇게 많은 자연의 이치가 들어있다니... 가을 서리에도 국화꽃의 향기가 진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옛날부터 국화는 군자와 은일처사의 굽히지 않는 지조의 꽃으로 알려져 있다. 서리가 내리는 음력 9월이 되면 대부분의 초목들이 시들지만, 국화는 서리를 맞으면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추위를 견뎌내는 생태적 특징 덕분으로 여러 충신과 은일문사들이 국화의 고결한 모습을 보고 시와 문장으로 예찬하고, 자신의 충절을 국화에 비유하여 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최초로 국화를 언급한 문인은 춘추전국시대의 시인이자 정치인이었던 굴원(屈原, 기원전 340년 ~ 기원전 278년)이다. 그는 초(楚)나라의 충신으로 충언을 아끼지 않다가 간신들의 음해로 강남지방으로 유배를 떠났으며, 뜻을 펴지 못한 그는 호남성(湖南城)의 멱라강(汨羅江)에 투신하여 충의를 다하였다.

그는 이러한 아픔을 ‘이소(離騷:우수에 부딪힌다.)’라는 시에 담아냈다.

아침에는 목란의 떨어지는 이슬을 마시고,/ 저녁에는 가을 국화의 떨어진 꽃잎을 먹네./ 만약 내 뜻이 참으로 아름답고 정수하다면,/ 오래도록 굶주려 파리해도 무엇을 슬퍼하리오.

“아침에는 목란의 떨어지는 이슬을 마시고, 저녁에는 가을 국화의 떨어진 꽃잎을 먹네.”의 구절을 통해 굴원은 아침 저녁으로 학문과 덕행을 쌓아 인품이 높고 고상한 문인의 자세와 지조, 충절을 난초와 국화로 비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화는 매화, 난초, 대나무와 함께 그 생태적 성질이 군자의 지조와 절개, 충절 등의 고결한 자세와 덕목과 같다고 하여 흔히 사군자(四君子)라고 부르며, 오래전부터 군자의 상징물로 문인들의 애호를 받아왔다.

늦가을에 피어나 서리를 맞으면서 꽃을 피우는 국화의 고고한 자태는 오상고절(傲霜孤節), 상하걸(霜下傑), 세한조(歲寒操) 등 다양한 애칭으로 불리며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국화의 생태적 성질은 다양한 상징을 띄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굴원(屈原, BC 약343-약227), 도잠(陶潛, 365-427) 등 문호(文豪)들의 시와 문장을 통해 유교적 맥락에서 군자(君子), 충신(忠臣)의 높은 지조(志操) 그리고 은일처사(隱逸處士) 또는 은자(隱者)의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삶을 표상하게 되었다. 또한 국화의 진액이 흘러내린 계곡물을 먹어 장수했다는 중국 남양국수(南陽菊水)설화를 비롯한 신선사상과 결합되어 무병장수(無病長壽)와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상징성을 띄게 되었다.

일찍이 동아시아 사람들은 국화를 먹으면 신선처럼 오래 살 수 있고 사악함을 쫓아낼 수도 있다고 믿어 국화자액, 국화술, 국화차 등을 마셨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국화를 연명화(延命花), 연수화(延壽花), 수객(壽客) 등으로 불렀다. 그 덕분에 지금도 국화꽃은 국화차, 국화주 등으로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이제 문인화풍의 국화를 먼저 만나보자.
 

묵국도-심사정
현재 심사정(玄齎 沈師正 1707-1769)작 묵국도(墨菊圖) 22.0cm X16.0cm 지본 수묵 한양대학교 박물관 소장.

사군자 가운데 가장 늦게 유행한 국화는 18세기가 되어서야 널리 그려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남종화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심사정의 묵국도(墨菊圖)가 가장 이른 예이며, 심사정이 그린 사군자 그림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국화이기도 하다.

심사정은 당대부터 산수보다는 화훼(花卉)와 초충(草蟲)에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이 작품 역시 자신의 특기를 살려 밝고 부드러운 화훼초충도의 분위기를 내고 있다.
 

화조도병풍-호림박물관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9-1892) 작 국화(墨菊),22.2cm X32.5cm 지본 수묵 화정박물관 소장

전통적인 문인화풍계열로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9-1892)이 대표적 작품이다. 양식적 특징은 담채를 뺀 수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수묵화의 담박하면서 소쇄함을 추구하고 화보에 실린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흡사하게 임모하고, 화법과 뜻을 배워 이를 통한 표현을 중요시하며, 유명문인들의 시와 자신의 생각을 화제로 채워 화가 마음의 뜻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문인화가들이 국화를 화제로 쓴 이유는 국화 자체가 아니라 국화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인격이었고, 국화를 그린 것은 인격 도야와 자기 수양을 위해서였다.

자 이제 민화에서의 국화꽃을 보러 가보자.
 

화조도-가회민화박물관(1)
작가미상 화조도 19세기 후반 41.5cm X 74cm 지본채색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민화에서의 국화꽃은 문인들이 그렸던 묵국도(墨菊圖)의 정형화된 구도와 문양 등을 차용하여 비교적 쉽게 단순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이 그려졌다. 그러나 고매한 묵국도와는 다르게 민화에서는 수묵보다는 채색을 사용하고, 청아함과 담박함보다는 순박하면서도 과장된 표현이 돋보이고 장식적인 측면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국화도의 등장 소재들도 유교적 상징물보다는 길상적인 상징물들이 대다수여서 앞서 소개했던 묵국도와는 다른 성격을 지녔음을 짐작케 한다.

묵국도가 문인들이 여기로 그리던 그림답게 능숙한 필묵의 운용과 함께 괴석이나 대나무, 난초 등의 유교적 상징성을 지닌 소재들을 국화와 함께 그려 문인화의 고상함과 품격을 한층 더 높이고자 했다면 민화 국화도는 다른 종류의 꽃들이나 문방구, 한 쌍의 새, 나비 등 부부의 금슬(琴瑟)과 화목함의 상징물과 조합을 이루고 있으며, 주로 화훼화나 화조·영모화 또는 책가도 형식의 작품들과 구성된 병풍으로 제작되어 실용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국화는 군자의 꽃이기에 앞서 신선의 꽃이며 불로장생과 무병장수의 꽃이다. 문인계층에서 국화의 군자적 상징성을 선택하여 묵국을 즐겨 그린 데 반해 민화에선 불로장생과 장수, 평안을 염원하며 그 길상의 기운을 받고자 했다.
 

화조도병풍-호림박물관
작가미상 화조도10폭 병풍 19세기 후반 42.5cm X92.0cm 견본채색 호림박물관 소장.

요즘 새로 시작하는 TV드라마(홍천기)에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리는 신령스러운 화공의 파란만장한 러브 스토리가 화제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다양한 옛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라 필자도 열심히 챙겨본다. 어제 방영된 스토리에는 위 그림처럼 흐드러진 꽃 아래로 메추라기가 그려져 있는 그림(안화도)을 선물 받고 기뻐하는 남자 주인공의 얼굴에서 그림의 역할이 무엇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살아가다 보면 어려움도 만나고 불편한 현실과도 부딪치므로, 우리는 걱정이나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누구나 갖기 마련이다. 아마도 이런 그림에는 이러한 마음이 두루 담겨있는 것 같다. 깊어가는 가을, 진한 국화향기를 통해 자신의 삶에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박승온ㆍ사단법인 한국현대민화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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