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취선을 넘어
절취선을 넘어
  • 승인 2021.10.10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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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한창, 꿈속을 여행하던 중이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보나 마나 보이스피싱이거나 아니면 광고 전화겠지'라며 팽겨쳐 둔 채 꾸던 꿈을 마저 청하려는데 벨소리는 끈덕지게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치근덕거리는 벨소리에 놀란 잠이 달아난다. 끝자리가 왠지 낯익다.
"미안하지만 차를 조금만 앞으로 당겨주시면 안 될까요?"
불현듯 어젯밤, 그 남자의 집 앞에 주차한 일이 떠오른다. 제아무리 급해도 여간해선 그 집 앞에 주차하는 일이 거의 없던 터였다. 내가 집에 도착한 그 시간, 내 집 앞 주차구역엔 이미 낯선 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전화하기도 그렇고 집 근처 어디라도 주차할 곳만 있으면 그곳에 대 놓고 걸어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동네를 몇 바퀴 돌고 돌아봐도 끝내 찾지 못해 하는 수 없이 그 남자의 공장 앞에다 주차했던 것이 불찰이었다. 출근 시간 전까지 다른 곳으로 옮겨야지 생각하며 잠을 설치던 중이었는데, 물건 상하차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계를 보니 출근 시간까지는 한참이 남아 있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졸린 눈을 비비며 열쇠를 들고 나갔다. 생각했던 데로 몇 걸음만 더 바퀴를 움직이거나 핸들을 돌리면 충분히 자신의 차를 주차할 수 있어 보였다. 그런데도 사내는 자기 집 앞까지 선을 넘어왔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불편하다 여기는 듯 보였다.
주차하는 일이 게임도 아니고 금을 밟아 이 게임에서 졌으니 흔쾌히 뒤로 물러나라는 듯 보인다.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그의 속내가 '조금만 앞으로 당겨 달라'는 그 조금이라는 '한 치'의 거리로 보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꼭두새벽에 굳이 전화해서 잠든 나를 깨운 것을 보면. 내가 그렇게까지 사내를 생각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평소 그의 행동을 보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일이었다.
꽉 찬 백 리터 쓰레기봉투 하나가 급하게 뛰어나가던 나의 헛발질에 튕겨 나간다. 퍽! 하고 쓰러진다. 마침 청소차가 쓰레기를 수거하던 중이었다. 발에 걸려 넘어진 쓰레기는 사내가 내놓은 것이란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장정의 미화원 둘이서 쓰러져 나뒹구는 쓰레기봉투를 일으켜 세운다. 마주한 네 손의 힘을 모아 겨우 차 위로 들어 올린다. 미화원의 어깨위로 쓰레기봉투에서 흘러나온 진물이 범벅이 된다, 잠시 기우뚱하던 차에 비닐이 찢어진다. 철사나 구겨진 캔, 깨진 유리 조각이며 구멍을 뚫지 않은 일회용 가스용기와 담배꽁초 등 사방이 온통 한데 섞인 쓰레기로 난장이다.
'절취선'을 한참 넘어 미어터질 기세다. 골목 끝, 전봇대에 지친 듯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다. 안에 담긴 쓰레기 위로 용량을 초과한 쓰레기가 더 덧대어져 있다. 행여 누구라도, 아니면 골목을 오가는 고양이들의 발길질에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속에 것들이 울컥울컥, 불어난 홍수처럼 범람할 것만 같아 위태롭다. 묶이지 못하고 삐져나온 나머지 쓰레기들은 유리테이프에 의해 옴짝달싹 못하게 결박된 듯 묶여있다. 사내는 매번 이런 식으로 자신의 쓰레기를 남의 집 앞, 전봇대에 당연한 듯 버리고 있었다. 시간도 요일도 무시한 채 아무 때, 아무렇게나. 대책 없이.
높아지고, 가득 채우고 싶은 욕망은 나에게도 누구에게도 있을 것이라고 이해를 해 보지만 그 끝이 자주 위태하고 넘쳐흘러 제풀에 무너지고 만다면 슬픈 일이 아닐까. '만이불일(滿而不溢)'이란 말이 있다. 과욕에 의해 '넘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다. 무엇이든 충분하게 채우되, 넘치지는 않게 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릇에 물을 과도하게 부어 넘치면, 주변의 물건들이 모두 젖어 못 쓰게 되는 것처럼 쓰레기도 마찬가지 아닐까.
몸이든 마음이든 어디든 '적정선'이 있듯, 취할 것과 버릴 것들의 경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절취선에 맞게 절제하고 삼가며 유익하게 사용해야 하리라. 철철 넘치게 한다거나 남용하면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까지도 해를 끼칠 수 있으니 말이다.
주차하고 돌아와 누워 못다 핀 꿈을 다시 꿰어 꾸어 본다. 내 맘의 쓰레기를 남의 집 앞에 함부로 무단투기하지 말기를. 제 앞가림은 제가 하고 살아야 하듯 내 집 앞, 내 맘은 내가 쓸고 닦을 수 있기를. 그런 깨끗한 마음 하나하나가 모여 가족이 되고 이웃이 되어 나아가 세상이 좀 더 맑고 고요하기를.
아침이 오고 있다. 하늘이 열린다. 때맞춰 오는 가을이 푸르고 해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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