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의 꿈
돌담의 꿈
  • 여인호
  • 승인 2021.10.11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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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억새꽃이 다복다복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하얀 실구름에 업혀 오는 선선한 가을바람은 긴 걸음으로 땀에 젖은 이마를 한 자락 위안으로 스쳐 갑니다.

따스한 가을볕을 쪼이며 노랗게 번져가는 황금빛 들녘 한 귀퉁이로 구멍 숭숭 뚫린 돌담이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딘 흔적을 붙인 체 구불구불 이어져 있습니다.

시골집 돌담은 큰 돌, 작은 돌, 알록달록한 돌들이 땅의 생김을 따라 자연스레 쌓여 있는 것이 욕심 없는 집주인의 소박함 그대로 닮아있습니다.

바람이 술술 지나는 성근 구멍의 돌담이 허술해 보이긴 해도 그 구멍을 통해 이웃들 간의 소박한 정이 오가며 정겨운 웃음소리가 넘나들었을 것 같아 왠지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계절 따라 봄날에는 나지막한 들꽃의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비 오는 가을날에는 정갈한 고즈넉함을 가져다주기도 했을 것이며, 흰 눈이 희끗희끗 쌓여 앉은 겨울 돌담은 해묵은 수채화처럼 담백한 푸근함을 선사하기도 했을 겁니다.

지인은 돌담을 쌓을 때 너무 빽빽하고 촘촘하면 쉬이 허물어질 수도 있기에 바람에 맞서려 완벽한 차단벽을 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일러줍니다.

무엇이든 틈이 있어야 튼튼하다는 건축학적 이론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틈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채우고 메우는 일보다 틈을 두는 것이 더 힘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완벽함에 집착하여 본질은 제쳐두고 겉치레에 마음을 빼앗겼던 기억들, 그로 인해 속절없이 허물어졌던 감정과 관계들, 바람이 지날 틈은 두고 살아도 된다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앞만 보며 살았던 어설픈 시절이 아쉽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합니다.

인생의 바람이 수월하게 지나도록 군데군데 구멍을 내야 든든히 버틸 수 있다고 수천 년 전의 바람이 전해주고 간 그 말을 이 가을에서야 두 손 모아 읊조립니다.

농부가 꽃으로 기르고 있는 잡초도 있으니 농부의 말을 듣기 전에는 잡초라고 함부로 뽑지 않으려는 섬세한 헤아림으로 가족과 어려운 이웃의 곁을 무심히 비켜 가지 않기를 마음으로 다져봅니다.

삶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만져주고 억눌림을 풀어내어 슬픔의 길목에서 벗어나도록 따스한 위로가 되어줄 온기 있는 글을 쓰고 싶어 흔하디흔한 잡초와 고운 자태의 들꽃들이 풍성하게 어울려 한들거리는 돌담을 마주하고 잠시 눈을 감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보고 듣기 위하여….



배은희 대구도림초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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