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손갤러리, 이배 개인전
우손갤러리, 이배 개인전
  • 황인옥
  • 승인 2021.10.2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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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품은 숯, 고향에 에너지 불어넣다
숯 반·나무 반 ‘불로부터’ 연작
달집태우기·과수원 말뚝 영감
죽음→삶 환원 가능한 힘 강조
이배 작가가 우손갤러리에 설치된 작품 ‘불로부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배작가-우손갤러리
이배 작가가 우손갤러리에 설치된 작품 ‘불로부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배는 숯의 작가다. 타고 남은 불의 정수(精髓)인 숯 조각을 캔버스에 채워서 표면을 연마하거나, 숯 더미를 밧줄로 묶어 공중이나 바닥에 설치하거나, 숯가루를 물에 섞어 숯의 수묵(水墨)으로 표현한다. 30년간 숯과 동고동락하며 숯 예술의 일가를 이뤄왔다. 최근 개막한 우손갤러리에 그의 작가정신이 관통하는 작품 30여점이 소개되고 있다.

최초의 숯 작업은 1990년에 시작됐다. 경신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1989년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무작정 건너간 파리에서 맞닥뜨린 것은 현실의 벽. 작업실을 얻는 것도, 물감을 사는 것도 힘에 부쳤다. 그는 “그림 그리는데 따르는 제약을 걷어내는 것”으로 해결책을 모색했다. 제약을 걷어내는 것은 곧 작가에게는 자유를 의미했다.

작업실은 파리 인근의 폐쇄된 담배 공장을 활용했다. 그의 집에서 걸어서 많게는 2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매력에 이끌렸다. 문제는 물감이었다. 비싼 물감으로는 작업을 마음대로 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때 우연히 눈에 목탄 포대가 띄었다. 숯 작업의 시작이었다. 물감 가격의 20% 정도에 해당하는 저렴한 가격의 숯으로 매일 데생을 하고 실험을 할 수 있었다.

숯은 경제적 제약의 산물이었지만 그는 질료를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속성을 발견하고 싶어했다. 지구촌 곳곳에서 몰려든 작가들 틈에서 “무엇으로 나만의 이미지를 만들 것인가?”에 천착했다. 비록 열악한 여건으로 선택한 숯이었지만 “숯을 통해 세계인을 이해시킬 수 있는 나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려 한 것”이다.

그가 숯에서 발견한 것은 사물의 일반적인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것은 일상성을 벗어버린 순수로의 환원이었다. 작가는 검정을 통해 죽음의 형태를 부각하기보다 자신의 신체성을 통해 에너지로 환원하는 것에 포커스를 맞췄다. 숯이 그의 몸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머금어가는 순간이었다. “타고 남은 숯은 다시 불로 환원할 수 있는 에너지를 머금고 있다. 죽음에서 삶으로의 확장이다.”

파리에서는 실력과 운이 함께 했다. 세계 곳곳에서 몰려든 작가들 틈에서 이배는 일찍 두각을 나타냈다. 숯 작업 1년만인 1992년에 유명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이 기사로 실리고, 그것을 계기로 1994년에 파리의 모 화랑에서 개인전 초대를 받았다. 이후 그는 승승장구해 유럽에서 대가(大家)의 칭호를 얻었다.

그는 2018년 프랑스 문화예술훈장 기사장을 받았고, 미국 뉴욕 페로탱 갤러리와 이탈리아 베네치아 빌모트 파운데이션에서 개인전을 잇따라 열며 국제적 명성을 쌓아왔다. 2000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이배 작가의 성공비결은 한국적이라는 특수성을 범세계적인 보편성으로 녹여낸 데 있다. 그는 적어도 현대미술에서 만큼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적’이라는 특수성을 현대미술이 추구하는 ‘보편성’의 범주로 환원하지 못할 경우 작가로서의 확장성을 보장 받을 수 없다는 인식이 아래, 보편의 감성으로 치환하는데 에너지를 쏟았다.

이배는 한국 수묵의 세계, 죽음과 삶이 하나라는 동양의 순환적 세계관, 농촌이라는 태생적 정체성을 서양과 도시의 산물인 현대미술의 보편언어로 치환하는데 30년을 할애했다. “한국 작가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는 그의 말대로 자신의 뿌리인 ‘한국성’을 현대미술의 ‘보편적 도상(圖像)’으로 재구성해왔다. 과거와 현재로 이어진 수묵의 세계가 된장국과 과수원을 기억하는 작가의 신체성과 만나 현대미술의 새로운 보편의 정신성으로 표출된 것.

동양문화권의 수묵세계를 현대미술로 재해석한 이배의 작품들이 우손갤러리에 구축되어 있다. 전시장 1층과 2층에는 숯을 쌓아 만든 ‘불로부터(Issu du feu)’ 연작이 설치됐다. 1층에는 고향인 경북 청도에 있는 과수원 말뚝 수백 개를 반쯤 태워 켜켜이 쌓은 작품이, 2층에는 어린시절 마을 공동 마당에서 보았던 달집태우기의 오마주인 숯을 천장 높이까지 쌓아올린 작품이 설채됐다.

과수원 말뚝을 절반만 태운 작품에 예술을 바라보는 작가의 철학이 묻어난다. 그는 “절반은 숯이고, 절반은 나무다. 이 두 상태에 현실과 현실 너머의 세계 사이의 경계에 놓여있는 예술의 위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공간에는 2019년부터 소개된 ‘드로잉(Drawing)’ 연작도 걸렸다. 사포질하고 남은 숯가루를 물에 풀어 구축한 서예의 획이다. 서예의 획을 재해석한 ‘드로잉’ 연작에서 물성과 정신성이 단단한 균형감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는 작가를 “수없이 허물을 벗으로고 애쓰는 사람들”이라고 정의 내렸다. 새로움을 제시해야 하는 예술의 역할에 대한 언급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역할에 충실할 수 있을까? 이배는 “신체를 통해 보이는 반과 보이지 않는 내면의 반이 만나야 한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더 깊은 곳을 끌어낼 수 있어야 더 멀리 바깥으로 보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답은 먼 바깥에 있지 않다. 자신의 깊은 내면에 있다. 내가 숯을 통해 순수한 세계에 다가가려 했듯이 나의 숯 작품들을 통해 사람들도 자신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며 순수를 경험하기를 바란다.” 우손갤러리 전시는 11월 19일까지며, 보건대학교 인당뮤지엄에서도 이배 초대전이 내년 1월 20일까지 열린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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