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깨작대지 말고 내 배만 채우지 말 것이며…”
“음식은 깨작대지 말고 내 배만 채우지 말 것이며…”
  • 김종현
  • 승인 2021.10.2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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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식 세계로> - (35) 은둔의 나라 조선의 선비들
선비의 정형적 음식문화
유교경전서 언급된 행동철학
자신의 몸가짐을 극히 조심
국제표준 식사예절로 손색 없어
“손으로 집거나 소매 적시지 말고
많이 먹고자 밥을 뭉치지 말라
물 마시듯 후룩 들이마시거나
음식에 침 바르지 말아야 한다”
핑거푸드
음식대접에 감사하는 의미로 손가락으로 집어먹거나 맛있다는 표시로 빨아먹기도 했던 finger food는 동서양에 다 있었다. 그림 이대영

우리나라의 선비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삼국시대 초기에 유교문화가 흘러들어옴에 따라 선비덕성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성장했다. 최초 선비는 고구려 고국천왕 때 을파소(乙巴素, 생년미상~203)로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살고, 때를 만나면 나와 벼슬하는 게 선비의 떳떳함이다(不逢時則隱,逢時則仕, 士之常也).”고 했다. 소수림왕 2(372)년 고구려는 태학(太學)을 설립해 박사(博士) 인재를 양육했다. 고구려 영양왕 때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 생몰연도 미상)은 ‘신집(新集)’ 10권을 집필, 백제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高興, 생몰연도 미상), 신라 진흥왕 때 문사(文士)들이 국사(國史)를 편찬하고 강수(强首, 생몰연도 미상)와 설총(薛聰, 655~730) 등 선비들이 활약했다.

설총의 ‘화왕계(花王戒)’작품은 선비로서의 간언을 담았다. 신라말기 입당 유학생으로 당빈공과(唐賓貢科)에 장원급제했던 최치원(崔致遠, 857~ 900)이 대표적 선비였다. 고려시대 국자감(國子監)은 박사 양성·과거제도를 정립해 진사과와 명경과로 선비를 등용했다. 사학기관으로 12공도(孔道)가 있었고, 고려 충렬왕 때 안향(安珦, 1243~1306)과 백이정(1247~1323)이 주자학을 도입해 사회개혁의식을 발아시켰다. 이색(李穡, 1328~1396), 정몽주(鄭夢周, 1338~1392), 이숭인(李崇仁, 1347~1392), 길재(吉再, 1353~1419) 등은 조선선비의 귀감을 만들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백성은 존귀하나, 국왕은 경미하다(民爲貴, 王卽輕)는 신권중심(臣權中心) 민생기반의 위정체제가 정립되었다. 건국초기에 건국 혁명세력이 중심이 된 훈구파(勳舊派)와 이에 대항하는 절의중심 사림파(士林派)의 양분체제가 선비공동체의식을 형성했다. 격화된 양립구조는 정반합이란 담론체계를 넘어선 사화(士禍)를 자초했다. 이런 선비문화는 사농공상 신분제(士農工商身分制)를 강화시켰고, 백성이 국가의 터전(民爲國之本)이라는 건국이념을 망각한 ‘관리는 존귀하고 백성은 비천할 뿐이다(官尊民卑)’라는 결과를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를 요약하면, i)스스로 몸 닦기(修己)는 소학(小學) 혹은 격몽요결(擊蒙要訣)을 기본서로 문학, 역사 및 철학을 필수과목으로 한 도기론(道器論)을 철학으로 했다. ii) 대인관계(治人)에서 있어서는 관료가 되기 위한 소과와 대과를 중시, 학파와 정파에 소속해서 정치가로 득세했으며, 은둔하거나 난세처신을 했다. iii) 생활태도는 외유내강(外柔內剛), 청빈검약, 박기후인(薄己厚人), 억강부약(抑强扶弱)과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실행했다. iv) 가치지향은 학행일치(學行一致), 의리명분(義理名分), 극기복례(克己復禮), 대동공생(大同共生) 및 일이관지(一以貫之)였다. v) 삶의 멋으로는 학예일치(學藝一致), 도문일치(道文一致), 문자향(文香)과 서권기(書券氣)를 삼았으며, 산천유람(山川遊覽)을 하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 향토애(鄕土愛) 및 진경산수(眞景山水)에 도취했다.

전한(前漢) 때에 ‘회남자(淮南子)’를 저술한 유안(劉安, 출생미상~BC 164)이 팔공산(安徽省八公山)에서 신선이 되기 위해 연단(煉丹)을 할 때에 만들어 먹었던 신선식(神仙食)이 두부였다. ‘소이사대(小以事大)’의 사대사고(事大思考)를 가졌던 고려의 권문세가(權門勢家)들은 물론 사찰 스님들도 두부를 선호했다. 고려 말기 이색(李穡, 1328~1396)은 ‘대사가 구해온 두부를 먹는다(大舍求豆腐來餉)’라는 시 구절에 “나물국 맛이 없기가 오래전부터인데, 두부가 입맛을 새로 돋궈주나니. 이 빠진 이 사람도 먹기는 딱 좋다네. 늙은이 몸보신엔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는가(便見宜疏齒, 眞堪養老身)?”라고 읊었다.

서민들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실정(糊口之策)’임에도 조선시대 양반들은 하루 다섯 끼 식사(一日五食)를
즐겨 먹었다. 모여서 음식을 나누는 회식(會食)과 중국인들이 신선식이라고 했던 두부(豆腐)를 별미로 좋아했고, 계절 따라, 날씨 따라, 분위기 따라 어울리는 음식을 즐기는 식도락(食道樂)에 빠졌다. 하루 다섯 끼는 미죽, 조반(朝飯), 중면(中麵), 석찬(夕餐)과 밤참이었다. 이런 준비를 위해 하인들은 동트기 이른 새벽부터 야삼경(夜三更)까지 부엌일을 해야 한다. 양반들의 식탁에는 기본 미반, 각종 국, 고기종류, 생선종류, 탕(湯), 찌개, 전(煎), 구이, 나물종류, 김치종류 등이 차려져 있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소이사대(小以事大)의 표상음식을 두부로 생각하고 연포회(軟泡會)를 학문적 연찬과 연계해 발전시켰다. 1540년 김유(金綏, 1491~1555)가 저술한 ‘수운잡방(需雲雜方)’에 두부요리가 적혀있다. 그의 손자 김령(1577~1641)의 ‘계암일록(溪巖日錄)’에서 “담백한 음식(素食)을 먹으면서 선비들이 산사에서 학문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연찬회(素食談論會)”라고 했으나, 연포회(軟泡會)를 빙자해 업무를 뒷전으로 했던 관리들로 인해 조정에서는 몇 차례 논란이 되었다. 17세기는 i) 연포탕이 쇠고기탕으로, ii) 사찰승려를 겁박까지 하는 상황에서, iii) 1754년 4월7일 영조는 신하들에게 산사 연포회에 대해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금지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연포회 대신에 중국에 유행하고 있었던 ‘화과회(火鍋會)’가 도입되었다. 처음엔 솥뚜껑을 뒤집어 놓은 번철(燔鐵)에다가 고기를 구워먹는 ‘난로회(煖爐會)’가 였다. 번철은 보다 고매한 이름인 ‘신선로(神仙爐)’ 혹은 ‘입을 즐겁게 하는 물건 신선로(悅口子神仙爐)’가 개발되었고, 구이와 육탕을 같이 먹을 수 있는전립투(벙거리)전골(氈笠套煎骨)로 발전했다.

◇우리나라 선비의 정형적 음식문화

유교경전으로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및 주역(周易)이 5경이다. 이 가운데 선비의 기본적인 개념, 행동규범 및 음식에 대한 규정을 언급하고 있는 경전은 예기(禮記)다. 예기의 유행편(儒行編)에서는 정신자세(精神姿勢)와 행동철학(行動哲學)을 언급하고 있다. 행동(예절)거지 및 음식에 대해서는 내칙편(內則編)을 따로 내고 있다. 이 내칙편(內則編)만을 때어내어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유생들에게 ‘소학(小學)’이라는 과목으로 가르쳤다.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에 향사하고 있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소학을 배우는 학동처럼 선비의 규범을 실천궁행(實踐躬行)’했다는 존경의 뜻으로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칭한다. ‘소학’은 “적은 지식이지만 강력한 행동(小學而强行).”을 뜻했다. 소학이 정형화하고 있는 ‘선비의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 of scholar)’은 10세까지 아버지와 선생 찾아 배우고(家內生育), 20세에 성년으로 관례(冠禮)와 널리 배움(博學)을 구하며, 30세 아내를 맞아 살림(娶嫁)을 꾸민다. 40세 벼슬에 나아가서(就仕), 70세에 퇴직(致仕/懸車)한다로 요약된다. 이에 반해, 오늘날 정보화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라이프 사이클은 트리플 서티(Triple Thirty) : 30년 배움, 30년간 직장생활, 은퇴 후 30년 여생 즐기기다.

당시 선비들의 식사예절은 선비는 조심하지 않는 것이 없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몸가짐을 극히 조심했다. 자기의 몸이라는 게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라서 극히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을 상하게 하는 게 바로 부모님을 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음식 하나라도 조심과 가려서 먹어야 했다.

이는 오늘날 국제표준 식사예절(global dining etiquette)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보다 자세히 말하면, 예기(禮記)에선 완곡히 조심해야 할 사항(曲禮編)으로 i) 남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때 내 배만 채우려고 하지 말라(共食不飽). 과거 일본 사무라이문화에서도 ‘배려의 고기 덩어리(遠慮の塊)’로 상대방을 위해 마지막 고기 한 토막을 남기는 풍습이 있었다. ii) 같이 음식을 먹을 때는 손으로 집어먹거나 옷소매를 음식에 적시지 말라(共飯不澤手). iii) 같이 먹을 때, 많이 먹고자 뭉치거나 밥숟가락을 크게 떠서 먹지 말라(毋放飯). 물론 결혼식 등의 축하연 음식대접에 감사하는 의미로 손가락으로 집어먹거나 맛있다는 표시로 빨아먹기도 했던 ‘손가락 음식(finger food)’가 동서양에서도 있었다.

또한 같이 먹는 사람을 배려해서 iv) 물을 마시듯이 후룩 들이 마시거나, 음식에 침을 바르거나 혀를 차지 말라(毋咤食). v) 게걸스럽게 뼈를 깨물어 먹지 말고, 자기가 먹던 반찬을 같이 먹는 반찬그릇에 놓지 말아야 한다(毋齧骨, 毋反魚肉). vi) 사람이 못 먹는 뼈를 개 등 동물에게 던져주지 말아라. 장식용으로 못 먹는 걸 구태여 먹으려 하지 말라(毋投與狗骨, 毋固獲). vii) 뜨거운 음식을 식힌다고 헤젓지 말라(毋揚飯). viii) 기장밥과 같은 낱알곡식 음식을 젓가락으로 깨작거리지 말고 숟가락으로 먹어라(飯黍毋以箸). xv) 나물이 들어있는 국을 국물만 들이 마시지 말며, 국에다가 맛이 없는 양 조미(調味)를 하지 말라( 毋絮羹). 주인이 이를 봤다면 맛있게 끓이지 못했다고 사과해야 한다. x) 이외에도 이를 쑤시지 말고, 젓국을 마시지 말라. 젓국을 마시면 주인은 조미를 못했기에 사과를 해야 한다. 부드러운 고기는 이빨로 끊어 먹으나 마른 고기는 손으로 찢어서 먹어라. 뜨거운 불고기를 한 입에 먹지 말라, 왜냐하면 입안도 목구멍도 상하게 된다.”

글·그림 = 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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