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 왕을 기다리며
[백정우의 줌인아웃] 왕을 기다리며
  • 백정우
  • 승인 2021.11.11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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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줌인아웃
‘나는 영국왕을 섬겼다’ 스틸컷.

지난 5일, 야당 대통령후보가 결정됨으로써 4개월 간 대통령선거의 막이 올랐다. 혹자는 대통령중심제의 폐단으로 대통령이 가진 절대 권력을 이야기한다. 역대 대통령이 저지른 실정의 바탕에 무소불위의 권력이 있었다는 얘기다. 종종 대통령을 비아냥거릴 때 왕의 칭호를 붙이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누가 뭐래도 한국 대통령은 왕에 버금가는 존재다.

이리 멘젤의 영화 ‘나는 영국 왕을 섬겼다’에서 근사한 호텔 주인이 인생 목표였던 주인공 디떼가 섬긴 것은 대영제국의 왕, 즉 배금주의였다. 삶과 일상이 돈으로 시작하여 돈으로 끝날 정도로 디떼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최적화된 인물이었다.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는 가운데 전혀 다른 세상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시절이다. 후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공정하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셀 수 없이 들어온 말이고 번번이 속았던 공약이다. 문화·예술계 일각에선 정권 재창출에 사활을 건 분위기도 감지되지만, 이 나라 정권치고 예술가의 창작 자유를 완전히 보장한 적이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보수정권이 대놓고 거슬리는 예술가를 배척하고 제거한 반면 진보좌파정부는 구미가 당기는 쪽을 적극 지원하고 호의적 태도를 취했을 따름이다. 예컨대 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진 ‘다이빙벨’을 둘러싼 부산국제영화제 파문이 서툰 자들의 우격다짐이었다면, 참여정부 시절 “‘효자동 이발사’ 같은 영화 3편이면 다음 선거도 문제없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대던 386국회의원과 권력자들 또한 영화를 정권의 지렛대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를 바 없다.

문화는 ‘인간화된’ 모든 것을 의미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관습과 삶의 양식이 문화이다. 권력자 입맛에 따라 쥐락펴락하겠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즉 어떤 정부가 들어서건 교육·문화예술 정책만큼은 장기지속에 초점을 맞춰야한다는 얘기. 권력자의 의지와 신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통령 후보의 공식 일정이 매번 빤한(순국선열 묘역 참배 등) 건, 문화예술을 대하는 후보들의 마음가짐을 반증한다. 첫 일정은 아니라도 극장이나 연극무대·미술관·음악당을 찾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일까.

‘나는 영국 왕을 섬겼다’의 주인공은 호텔을 소유하게 되지만 볼셰비키 혁명으로 하루아침에 몰락한다. 영화는 한 남자의 인생을 통해 자본가의 허위와 탐욕을 조롱하는 한편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의 욕망과 성취는 한낱 물거품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무릇 예술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조본능에서 만개할 수 있다. 새로운 정부가 펼치게 될 문화정책은 어떤 모습일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한국영화는 어떤 위치를 점하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내가 만나고 싶은 왕은 오직! 문화와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예술과 예술가를 존중하는 지도자이고, 내면의 품격까지 아름다운 사람이다. 창작의 자유를 온전히 보장해주며, 진영에 매몰되지 않고, 품격 높은 예술과 예술가를 섬기는 자가 왕이 되는 날은 올 것인가.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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