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 승려들이 쓰던 항아리가 유형문화재로…김칫독의 전설
3천 승려들이 쓰던 항아리가 유형문화재로…김칫독의 전설
  • 김종현
  • 승인 2021.11.1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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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식 세계로> - (38) 김치의 탄생과 질병 치료
290년경 역사서 삼국지 기록
“고구려 집집마다 움집창고
발효음식 먹기를 좋아했다”
덕유산 장수사 창건한 각연 대사
깊고 오목하게 파인 바위 활용
김칫독 만들어 혼자 먹기도
창포김치
주나라 문왕을 따라 공자가 먹었다는 창포김치. 그림 이대영

BC 91(무제정화2)년에 완성한 사마천(司馬遷, BC 145~ BC 86)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은나라 주왕 때 신하) 구후(九候)가 아름다운 자신의 딸을 임금에게 바쳤다.

그런데 구후의 딸이 주왕의 음탕한 짓을 싫어하자 그 딸을 죽이고, 아버지 구후(九候)까지 죽여 포(脯)를 떠 소금에 절여 젓갈을 담았다. 재상 악후(鄂侯)가 이를 만류하자 악후도 같은 방법으로 죽였다.”

이렇게 시작된 주왕의 잔인한 저해지형에 당한 저명인물로는 i) 애첩 달기를 노하게 한 백읍고(伯邑考)를 시작으로, ii) 달기의 아버지 구후(九侯)가 있었다. 이어 iii) 춘추시대 송나라 남궁만, iv) 공자의 유명한 제자였던 자로(子路), v) 그리고 연나라 정승이었던 자지(子之)가 있었다. 이외에도 팽월(彭越), 범강(范疆), 난경, 장균 등이 저해당했다.

이어 후한의 형벌에서도 AD 82년, 반고(班固, AD 32~92)가 저술한 ‘한서(漢書)’에선 5대 형벌 가운데 최고 극형은 저해형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형벌을 계수했다. 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에서도 삶아서 죽이는 팽형(烹刑) 혹은 탕형(湯刑)이 있었다. 실제로 조선실록을 살펴보면, 1737(영조13)년 8월 13일 “조태언(趙泰彦, 1686~ 졸년미상)보다 더한 자는 바로 금수(禽獸)이니, 왕자(王者)의 태아검(太阿劍)을 어찌 금수에게 쓰겠는가? 만약 대신(臺臣)이라 해서 참(斬)하지 못한다면 돈화문(敦化門)에서 팽형(烹刑) 에 처해야 한다. 빨리 와서(瓦署)에 명해 큰 가마솥을 만들어 대기하도록 하라.”라고 하명했지만 끝내 유배형으로 끝나고 1740(영조16)년 영조의 탕평책으로 풀려났다.

◇동이족 선비들의 소울푸드(soul food)로 김치 탄생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에 자극을 받았던 대원군(大院君)은 “모두 다 함께 새롭게 하자(鹹與惟新).”는 함여유신(咸與維新)을,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시월유신을 단행했다. 국가의 명맥을 새롭게 변혁하는 걸 유신(維新)이라 했다. 유신의 기원이 기록된 BC 560년경 시경(詩經)에 주나라 문왕(文王)을 공자는 동이족 선비의 비조(鼻祖)로 생각했기에 숭상했다.

또한 시경(詩經)에 “순무 따고 청무 따는데, 아래 걸 가릴 순 없다”라는 구절이 나오는 걸 봐서 BC 560년 이전부터 이미 무김치를 해 먹었다. 고고생물학에서 볼 때 지금으로부터 3천년 이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인도평원을 거쳐 중국에까지 무와 순무가 재배되었다.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제갈공명이 군량으로 무를 사용했다. 근래에 와서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에서 군용식량으로 먹었다.

구체적인 사례로는 BC 239년에 진시황제의 사실상 생부였던 여불위(呂不韋, BC 290~ BC 235)가 저술한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주나라 문왕이 창포김치를 매우 좋아했다는 말을 들었던 공자는 자기는 얼굴을 찌푸려 가며 창포식초 절임을 먹었다. 이렇게 해서 3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입맛이 들었다.” 동이족이었던 공자는 중국인들처럼 신맛보다 매운맛에 익숙했기에 자신의 롤 모델(role model)이였던 주나라 문왕(文王)처럼 창포식초 절이(昌蒲菹)에 익숙한 모습을 보이고자 벤치마킹(benchmarking)했다.

한반도에서는, 290년경 진수(陳壽, 233~297)가 개인적으로 기록한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에 “고구려는 큰 창고는 없지만 집집마다 부경이라고 하는 작은 움집창고가 있는데, 사람들은 발효음식을 정갈하게 저장하고 그걸 먹기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고문화학적인 물증으로는 487(炤知王9)년 각연(覺然) 대사가 창건한 덕유산 장수사(長水寺)에도 1자 깊이로 둥글고 오목하게 파인 바위를 김칫독(沈菜甕)으로 사용해, ‘승려 각연은 이 바위 안에 채소를 쌓아 오래 두어 김치로 만들어 자기 혼자만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고 노진의 옥계집(玉溪集)에 기록되어 있다.

683년 삼국사기에 신문왕 3년에 ‘김흠운 딸을 결혼시키는데 혼수품목으로 쌀 술, 기름, 꿀, 메주, 마른고기 및 김치젓갈 등을 135가마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대구 옥산신라 가마터에서 발굴된 팽이형 토기로 봐서 7세기 이전에 땅속에 묻어서 숙성된 김치를 해먹었다. 또한 보은 법주사(法住寺)엔 충북유형문화재 제240호 김칫독이 있는데, 720(성덕왕19)년 3천여명의 승려들이 먹었던 김칫독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고려시대의 김치에 대해서는 983년 고려 성종(高麗成宗) 2년, 고려사 예지(高麗史 禮志)의 원구단에 제물을 진설하였는데 ‘12 접시를 오른쪽에 3줄로 놓되 첫줄엔 미나리김치(實芹菹), 죽순김치(筍菹), 순무김치(脾析菁菹)를, 그 다음 줄에 부추김치를 밤과 함께, 앞에 물고기 젓갈과 토해를 그 다음에 셋째 줄에 돈박(豚拍)을 앞에 녹해, 안해, 삼식을 다음에 놓는다.’라는 설명문에 각종 김치가 나오고 있다.

1241년,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간행되었는데 그 문집에 ‘텃밭 6가지 채소예찬가(家圃六詠)’에서 오이(瓜), 가지(茄), 순무(菁), 파(蔥), 아욱(葵) 및 박(瓠)에 대한 예찬시가 있다. 그 가운데 순무(菁)에 대해 ‘순무로 담근 장아찌는 여름 3개월 먹기에 아주 좋구나. 소금에 절인 김장김치는 겨울 내내 밥반찬이 된다네. 뿌리는 땅속으로 자꾸만 커져가니 칼로 잘라먹으니 배 먹는 맛이니.” 1372년 고려시대 이암(1297~1364)이 원나라에서 1286년에 관찬한 ‘농상집요(農桑集要)’를 도입해 우리나라 실정에 맞도록 수정해 1372년에 배포했는데 여기에 ‘모든 종류의 무는 백성들의 식량에 도움이 되었으며, 그런 연유로 흉년에는 무가 기근을 많이 구했다”라고 적혀있다.

‘산가요록(山家要錄)’에서도 “무 뿌리는 봄부터 가을까지 김치를 만들어 먹어도 좋고, 4월에 씨앗을 받아서 기름을 짜기도 한다. 협서성(陜西省) 등지에서는 식용유로도 사용하며 연등을 밝히기도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음식으로 질환을 치료하자는 발상

당나라 의사이며, 도사(연금술사)였던 손사막(孫思邈, 581~682)은 681년 100세 기념으로 질병치료에 금쪽같이 요긴하고도 급한 비방만을 모은 천금익방(千金益方)30권을 저술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질병을 치료하는데 있어 먼저 음식으로 치료하고, 그래도 낫지 않으면 약을 쓰라(先以食治, 而藥治病).’했다.

오늘날 선진 의료기관에서도 질환치료에 있어 약으로만 치유하기보다 식품, 마음가짐, 운동과 같은 생활방식까지를 종합하는 섭생(攝生)으로 접근하고 있다. 특히 후성유전학(epigenetics)에선 음식은 유전자로 3대까지 유전이 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고대 연단술(煉丹術)의 하나인 약선(藥膳)을 생각했던 손사막 도사는 100세를 살아보고서 ‘천금익방(千金益方)’을 저술했는데, 그는 서문에서 “인간의 생명은 천금보다도 더 존귀하다. 약선비방 하나로 사람의 목숨을 구제할 수 있다는 게 이보다 더 큰 덕이 있겠는가? 그래서 천금이라고 적는다”고 했다.

그의 또 다른 의서인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에서도 i) 음식의 중요성과 ii) 음식이란 약으로 치료가 요긴함을 적고 있다. 즉 “몸을 평온하게 하자면 반드시 음식이 따라야 하며, 자신에게 적합한 음식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삶에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安身之本,必資于食.不知食宜者,不足以存生也).”

이어서 “음식이란 인체에 영양분을 제공해 면역의 에너지를 제공하기에 오장육부를 평온하게 해준다. 또한 혈기를 보존해서 마음까지 즐겁고 행복하게 한다. 음식으로 곱사등까지 고치고 병세를 완화시켜 질환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유능한 의사다. 식치요법이 가장 좋은 양생이다. 좋은 의사라면 먼저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고 이에 적합한 음식으로 치유해야 한다. 음식으로 치유가 되지 않을 경우에 약을 써야 한다(以食治之.食療不愈.然後命藥). 약치는 강렬한 군사작전과 같아, 질병뿐만 아니라 이외까지 마구 박살낼 수 있어 결국은 생명까지 소멸시킬 수 있다.”고 했다.

다시 강조하기를 “인체가 온화하고 평온하고자 하면, 오직 양생을 먼저 해야 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하고, 약기운에 의존한다면 몸이 평온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외부의 질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밝혔다.

글 = 권택성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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