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40℃ 시베리아 대구…매운 음식 많은 이유 있었네
영하 40℃ 시베리아 대구…매운 음식 많은 이유 있었네
  • 김종현
  • 승인 2021.12.1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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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식 세계로] - (41) 반골정신(反骨精神)이 따로국밥으로
매운맛의 시작
갓나물·무·배추·마늘·쑥 등
기원전 수세기부터 한반도 자생
신석기부터 갓나물김치 먹어
국 따로 밥 따로
탕평을 모르는 반골정신
음식문화에 그대로 반영
타지역과 다른 자긍심 나타내
고담대구
고담대구에 책임을 지는 정치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림 이대영

◇매운 맛의 시작

영하 40°C 한반도 시베리아 대구 혹은 냉동고 대구라는 추위를 극복하기 위한 음식이 개발되었는데 추위극복과 감기예방을 위한 발열효과 혹은 발한효과가 있는 매운 맛음식을 많이 먹었다.

매운 맛으로는 신라시대는 갓나물(芥菜), 냉이(薺菜, 고추냉이, 일명 영채인 큰다닥냉이, 달랭이), 고추여뀌(蓼菜), 무(菁, 순무, 갯무, 과일무, 나복(蘿蔔), 내복(萊蔔) 등), 촉초(蜀椒), 마늘(산마늘, 명이) 등을 이용했으나 임진왜란을 전후 남미고추(蠻苦草)가 도입되고부터 고추가 많이 먹혀졌다.

기원전 수세기부터 한반도에 자생했던 갓나물, 배추, 무, 마늘 혹은 달랭이, 쑥, 냉이, 여뀌 등이 시경 혹은 예기에도 나오고 있다. 특히 대구는 낙동강과 금호강 섶에 야생 갯갓나물, 갯무, 갯냉이(靈菜), 갯달랭이, 갯쑥갓, 갯여뀌 등 매운 채소가 자생했고, 팔공산과 비슬산 산자락엔 산갓나물, 산마늘(명이), 산달랭이 등이 지천이었다. 그래서 신석기시대부터 갓나물김치를 담아먹었다.

숭유정책을 실시했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갓나물김치, 큰다닥냉이(靈菜)김치의 매운맛으로 선비들은 신랄한 애환을 달랬다. 우리의 선조 동이족은 북풍한설 속에서도 푸름을 잃지 않는 배추를 기원전부터 재배해왔으며, 달구벌에서도 자생했다. 엄동설한 속에서도 푸름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억불숭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날씨가 차가워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는 선비기상과 닮았다는 배추김치를 더욱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정묘·병자 양란 이후에 중국에서 하얀 속살배추(白寀) 재배기법이 들어오고부터, 하얀 속살에 붉은 고추양념은 대구음식을 더욱 맛깔나게 했다.

이를 두고 인조 때 몇 명의 선비들이 돌아가면서 공저(rolling paper)한 ‘대동야승(大東野乘)’ 혹은 성종 때 이육(李陸,1438∼1498)이 중국견문을 기록한 ‘청파극담(靑坡劇談)’에선 배추의 하얀 속살을 ‘마님의 하얀 떡’에, 누렇게 숙성된 김치를 여종으로 비유하는 골계(滑稽)들이나왔다. 1477(성종13)년 서거정이 간행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서도 ‘묵은 김치의 묘한 맛’이란 음담패설이 있다. 그분은 우리가 잘 아는 ‘사가집(四佳集)’에서 대구십영(大丘十詠)을 노래했던 점잖은 분인데도, 친구 강진산에게 신 김치를 보내면서 동봉한 편지글 28자 가운데 “(아내의) 흰떡에는 (여종의) 묵은 김치가 제 맛이라는 데”라는 마지막 구절이 나온다. 오늘날 “텁텁한 고구마에도 속이 뚫리는 사이다가 제 맛이다.”라는 말의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사실, 대구를 처음 방문하는 외지인들에겐 대구의 매운맛을 가장 먼저 음식에서 느끼고, 다음으로는 뻣뻣한 ‘게다(げた, 나무 슬리퍼)’와 같은 배타성에서 대구사회의 매운맛을 새삼 느낀다. 요사이 대구의 ‘3포 세대(3-Abandoned Generation)’ 젊은이들은 일본 사토리세대(得道世代)가 좋아하는 회초밥(すし)의 생선과 밥 틈새 넣은 고추냉이(わさび)에서 와사비(山葵) 세상임을 느끼면서 세상 매운맛을 눈물과 같이 삼킨다. 호주머니 사정이 초밥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아들 녀석은 파 송송 계란 탁 신(辛)라면 한 그릇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속 풀이를 한다. 아내는 스시보다 단 한입에 땀이 송골송골 이마에 맺히고, 가슴까지 시원한 떡볶이(매운 떡)에 열광한다.

고담대구(Gotham Daegu)가 한때 유행했다. 고담이란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고모라(Gomorrah)’와 ‘소돔(Sodom)’을 합한 말이다. 고모라와 소돔은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므로 유황불로 소멸시켰던 도시였다.

대구시가 이런 악명을 얻은 건, i) 제1탄에서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의 대륙침략병참기지였다는 역사적 사실, ii) 1995년 상인동 가스폭발사건, 2003년 중앙역지하철 대참사 등으로 창세기 속 불의 부르짖음(outcry from fires)을 닮아 있다는 점에서다. iii) 암담한 고담을 구하고자 봉기했던 기사들(The Dark Knight)이 악당을 물리쳤으나, 대구시민들은 쥐도 새도 아닌 박쥐사람(batman)으로 남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고담도시 박쥐사람으로 남아있는 대구엔 진정 위대한 책임을 다하는 지도자가 없다는 말인가?

임진왜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란 외침으로 인해 당쟁당파와 국론분쟁은 극으로 치솟았다. 이때 서경에 ‘편들거나 무리를 짓지 않으면 국정은 탕탕하고, 무리 짓기도 편짜기도 하지 않으면 나라일은 평온화평(無偏無黨,王道蕩蕩,無黨無偏,王道平平)’이라는 구절에서 탕탕평평을 도모하고자 인사등용엔 탕평책(蕩平策)을 비롯하여 음식문화에서도 i) 국밥과 밥을 한곳에 말아서 한술씩 떠먹는 탕평탕(蕩平湯), ii) 온갖 음식을 한곳에 비벼서 한 숟가락씩이라도 나눠먹는 탕평반(蕩平飯)을 일명 비빕밥, iii) 잔치와 같은 큰일을 끝내고 고기, 찌짐(煎), 밥 등 온갖 음식 두루치기에다가 술 한 잔 나누는 탕평채(蕩平菜) 혹은 태평채(太平菜)가 사회적 화합과 안전을 도모했다.

그런데 경상도 감영이 있는 대구에서는 잡것들과는 다르다는 자긍심(異雜之心)을 보여주고자 “탕평탕이 머꼬? 개죽이지!”라는 반골정신(反骨精神)이 국 따로 밥 따로의 따로국밥을 탄생시켰다. 지금도 따로국밥이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특히 대구지역 정치의 경우 한주먹집어주기 예산 혹은 대통령 선물 보따리 같은 ‘보이는 주먹(visible fist)’이 바로 대구를 만족시켰던 따로국밥이었다.

◇다담상(茶啖床)에서 영남유림 예속을

오늘날 대구시 달성군 현풍(率禮), 1592년 임진왜란을 당면하자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문하생으로 붓을 놓고 칼을 잡아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곽주(郭澍,1569~1617) 선비는 광주이씨(光州李氏) 이홍량(李弘量)의 딸과 결혼했으나 사별했다. 이어 진주하씨(晉州河氏) 증참의 하준의(河遵義)의 딸을 후처(後妻)로 맞이했다. 이후 세월이 흘려 1989년 진주하씨(晉州河氏, 1580~1652)의 묘 이장으로 관장언간(棺藏諺簡) 172 통이 출토되었다. 한글내간(諺簡)은 1602년부터 1652년까지 쓴 내간(內簡)으로 105통은 곽주(郭澍)가 아내에게 보냈다. “오야(창녕군오야면)댁에게, 근심이가 매우 수고가 많으니 여름살이 해 입도록 삼 두 단만 주소. 자네 뜻으로 준 거로 하소...”라는 부부의 정을 담고 있었다. “임금도 보리밥을 드시니 우리라고 보리밥을 못 먹겠소.” 혹은 “출산이 다가오고 있으니 순산을 위해, 꿀과 참기름을 먹도록 하오.”라는 글에서 꿀 먹고 원기를 내고, 참기름을 바른 듯이 쑥~ 순산하기를 기원했다.

이어 “아주버님(媤三寸)이 근일 그곳에 다녀가니 다(차)담상(茶啖床)을 가장 좋게 준비하소. 술은 죽엽주(竹葉酒)와 포도주(葡萄酒)로 하시고...”라는 내간으로는 당시 영남유림(양반집)의 음식문화를 엿볼 수 있다. 진주하씨 부인이 시삼촌(아주버님)을 위해 마련한 음식은 3개의 상으로 “i) 다담상(다과상)에 절육(切肉), 세실(細實)과, 모과, 정과, 홍시, 자잡채를 놓고, 수정과엔 석류를 띄우고, ii) 곁상(밥상)에는 율무죽과 녹두죽 두 가지를 쑤어놓게 하소. iii) 안주상으로 처음에 꿩고기를 구워드리고, 두 번째는 대구를 구워드리고, 세 번째는 청어를 구워드리게 하소.”

◇영남유림(嶺南儒林)의 올곧음이 녹여진 대구음식

대구 경상감영을 구심점으로 영남유림의 본산이 형성되었다. 영남선비문화에서는 태산준령을 만들었다. ‘어진 사람은 산을 즐기고,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즐긴다(仁者樂山,知者樂水)’라는 개념에서 황금거북이 알을 품는다(金龜抱卵) 혹은 연꽃이 핀 학문의 전당(浮蓮池堂)으로 서원을 설립했다. 서원은 향교와 같이 향음주례와 향사례를 통해 지역사회의 음주문화를 주도했다. 평소 행동거지 하나 흩어짐이 없었고, 삼복더위에는 심산유곡에서 탁족시음회(濯足詩音會)로 피서를 했다. 임진왜란 전쟁 통에선 붓을 내려놓고 칼을 들자는 의병회맹(義兵會盟)을 했다.

이렇게 삶을 살 수 있었던 기반에는 송죽대절(松竹大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득보다도 먼저 정의로운가를 먼저 생각함(見利思義)로써 불의라고 생각되면 올곧음을 위해 목숨(見危授命)까지 내놓았다. “옥으로 부서질지언정 기와처럼 먼지들 뒤집어쓰며 오래 보전하지 않겠다(寧爲玉碎,不爲瓦全).” 대구지역의 올곧음은 한마디로 “부러질지언정 절대 굽히지 않겠다(寧折不屈).”이었다. 대표적인 언행으로 “내 말이 틀렸다면 내 목을 잘라라.”는 대부상소(戴斧上訴)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런 불의에 저항하는 선비정신은 2·28민주화운동으로까지 명맥이 유지되었다.

이런 선비문화가 대구음식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면, i) 탁족시음회는 물론 시문회 등에서 횡행했던 벙거지전골(전립투전골)음식, ii)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맹렬충성(猛烈忠誠)을 닮은 산갓김치와 영채김치, iii) 사대부의 종가음식으로 ‘머리에 먹물이 든 자손이 많기를 기원’하는 문어(文魚)와 같은 종묘제사음식, 이제마(李濟馬,1837~1899)의 사상의학(四象醫學:東醫壽世保元)의 철학을 반영한 빈객대접 음식문화, 관혼상제의 예물음식(이바지음식)은 고차원 예술작품이었다. iv) 향교(서원)의 향음주례(향사례) 음식과 책거리 음식문화까지 생겼으며, v)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진공음식(進供飮食)과 위정음식(爲政飮食: 요정음식, 기방가무음주, 도원결의주회)문화는 특이했다. 2,000년대 농담으로 김정일이 가장 겁먹었다는 남한의 폭탄주(爆彈酒)가 대구법조계 진공음식문화에서 기원을 하고 있다.

글·그림 = 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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