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의 꾸짖음(虎叱)
범의 꾸짖음(虎叱)
  • 승인 2021.12.30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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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대구예임회 회장 전 중리초교 교장

내일이면 2022년 임인(壬寅), 범의 해이다. 옛날부터 호랑이를 범이라고 했다. 조상들은 숭배의 대상으로 산신령, 산군(山君), 노야(老爺), 대부(大父)로 섬겼다. 노야나 대부는 백두산 호랑이가 많은 지역에서 불리던 이름이다.

단군 고기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 효자를 등에 태운 호랑이, 풍수에서 오른쪽은 백호 등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겐 친숙한 느낌을 주는 말들이다.

『계축일기』에는 '임인년(壬寅年)에 중전이 아기를 겨오시다(잉태하시다) 이야기를 듣고….'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 때의 임인년은 1602년(선조 35년) 범의 해를 말한다.
『계축일기』는 1613년(계축년)에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선조의 계비)를 폐위시켜 서궁에 가두었을 때의 일들을 썼다.

인목대비가 임인년에 잉태한 아기는 그 다음해 태어났다. 바로 정명공주(貞明公主)이다. 3년 후에 영창대군이 태어났지만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역모로 몰아 계축년(1613)에 죽였다. 그리고 인목대비를 폐모시키고, 정명공주는 옹주로 강등시켜 함께 서궁에 가두었다.

인목대비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정명옹주는 죽었다고 속였다. 정명옹주는 서궁에 숨어살면서 비통한 마음으로 한석봉 필법으로 '화정(華政)'이라는 거대한 글씨를 썼다. 글자 하나의 크기가 73cm라고 한다. 화정(華政)은 '빛나는 정치'라는 뜻이다. 인조반정으로 인목대비와 정명공주는 복위되었다.

임인년에 태어난 정명공주는 선조·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의 국왕과 시대를 함께 하며 83세까지 장수하였다. 21세의 늦은 나이에 홍주원과 결혼하여 7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광해군, 인조에게는 혹독한 미움을 받기도 했다.

정명공주는 자식들에게 '너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었을 때는 부모의 이름을 들었을 때처럼 귀로만 듣고 입으로는 말하지 마라.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입에 올리지 마라. 너희들은 죽을지언정 절대 경박하게 말하지 마라.'고 하였다. 정명공주는 후손들에게 겉으로 가볍게 나타내지 말고, 안으로만 인고할 것을 당부하였다. 후손인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을, 벽초 홍명희는 『임꺽정』을 글로써 잠시 속에 넣어두었던 것은 아닐까?

뜻은 안에 있으면서 잠시 속에 넣어두는 방법을 '츤탁법(儭托法)'이라 한다. 주변의 것들은 진하게 그리면서 중심 되는 내용은 여백으로 두는 기법이다. '홍운탁월법(烘雲托月法)'도 마찬가지이다. 달을 그릴 때 직접 달을 그리지 않고 구름을 검게 그리면서 달을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다.

조선후기의 유학자 유한준은 친구인 박지원의 『호질(虎叱)』을 '홍운탁월법'이니 '츤탁법'이니 하면서 혹평하였다. 호질은 '범의 꾸짖음'이라는 뜻이다.

유학자로 이름 높은 북곽선생이 정려문을 하사 받은 동리자라는 열녀와 정을 통한다. 동리자에게는 각성바지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과부인 어머니의 방에서 나는 소리를 여우가 침입하여 내는 소리로 착각하여 방을 에워싸고 들이친다.

유한준은 말한다. 사실 저러한 사대부들은 이 조선에 늘렸다. 어느 시절이든 저러한 이는 있게 마련이다.

다급해진 북곽선생은 어마지두에 혼겁을 하여 도망쳐 달아나다가 똥구덩이에 빠진다. 겨우 머리만 내놓고 발버둥 치다가 기어 나오는데 이번에는 큰 범이 앞에 기다리고 있다. 범은 유학자의 위선과 아첨, 이중인격 따위를 신랄하게 비판할 뿐 '더러운 선비'라며 잡아먹지 않는다.

연암은 범의 입을 빌어 '선비는 아첨하는 사람이다. 선비의 고깃덩어리는 잡스럽다. 그 맛이 순수하지 못하다. 딱딱하고 질겨서 먹으면 체하여 소화되지 않는다. 돈을 형님으로 부른다.'고 양반을 사갈시하는 독설을 내뱉는다.

희붐한 새벽녘, 북곽선생은 정신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가 조심스레 머리를 든다. 범은 보이지 않고 농부들이 지켜보고 서 있다. 북곽선생은 고추를 따다가 똥싸는척하면서 의뭉스럽게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조심하는 중'이라고 변명해 댄다. 엉너리치는 품새를 가증스럽게 표현했다.

명예와 체면을 형편없이 잃어버린 북곽선생은 모양새가 '개잘량(개털로 만든 탈바가지)'이다. 또한 '똥감태기(온 몸에 흠뻑 뒤집어 쓴 똥)'와 다를 바 없다.
새해에는 '범의 꾸짖음'이 메아리 되어 모든 사람이 되새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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