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갤러리, 지히 ‘큐피트’展…경쾌한 입술에 담은 ‘소통의 기술’
키다리갤러리, 지히 ‘큐피트’展…경쾌한 입술에 담은 ‘소통의 기술’
  • 황인옥
  • 승인 2022.02.1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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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인간, 입술로 형상화
하트·꽃·알파벳 등으로 변주
팝아트 화가다운 화려한 색상
얄팍해진 비대면 소통 아쉬움
지히작-choice
지히 작 ‘choice’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며, 언어나 표정, 제스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는다. 감정은 관계 속에서 더욱 복잡다단해 지는데, 감정의 동물이라는 인간의 소통 능력은 그다지 원활하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연인이나 가족과 사이에도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작가 지히도 10여년 전부터 소통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동했다. 직접적인 계기는 대학 졸업 후 떠난 프랑스 여행이었다. 여행지에 꽤 긴 시간 머물며 불어를 배우고 그들의 문화을 경험했지만 현지인들과의 대화를 시도할 때면 항상 아쉬움이 남았다. 프랑스에 대한 지식과 경험 부족 탓에 만족할 만한 소통을 하지 못했다. 한 나라의 문화와 사상 그리고 공동체 저변에 깔린 공통의 정서를 집대성한 것이 언어라고 규정할 때, 지히가 이해하는 불어는 겉핥기에 불과했다. 누군가에 대한 이해 부족은 곧 불안으로 연결됐다.

“프랑스의 역사나 문화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프랑스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을 때 어떤 대답이 돌아올 것인지 예상할 수 없었어요. 그것은 곧 혼란이었죠.”

여행자가 현지인과 흡족하게 소통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이방인이 완벽하게 현지인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히가 당시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은 평소 자신의 언어 구사력이었다. 돌이켜보면 “모국인 한국에서도 프랑스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소통이란 감정과 생각을 나누는 것인데, 그는 체계적인 생각의 틀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사회에 대한 이해가 높으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체계적이 되고, 그걸 경우 만족스러운 소통이 가능해 지는데, 저는 그런 것이 부족한 것 같았어요.”

누군가와의 만남에서 만족할 만한 의사소통을 하지 못했을 경우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설상가상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혀있을 경우 사안에 대해 충분히 어필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은 밤잠을 설치게 한다. 하지만 일상적인 만남이었다면 보통의 사람들은 아쉬운 상태로 흘려보낸다. 그러나 지히는 그런 가벼운 소통 조차도 무심하게 흘려보내지 못했다. 끝까지 붙잡고 아쉬움을 해소하고 싶어했다.

소통에 대한 아쉬움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작가가 선택한 대안은 혼자만의 독백. 캔버스를 앞에놓고 못다한 대화를 두런두런 이어갔다. 그 독백의 기록들이 캔버스에 차곡차곡 쌓였다. 캔버스가 곧 작가의 수다의 장이 됐다. “못다 한 이야기를 캔버스에 하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어요.”

소통은 입술의 형상으로 구체화된다. 입술은 말하는 인간을 상징하는 도상으로 채택됐다. 두툼한 브이(V)자형 윗입술과 그보다 작은 아랫입술이 겹쳐져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입술 형상은 첫사랑과 헤어진 후 느낀 감정에서부터 비롯됐다. 이후 입술은 개인의 감정에서 확장되어 사회적인 영역으로까지 진화해갔다.

입술에서 출발한 감정 표현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트나 연산기호, 꽃, 알파벳이나 영어단어 등의 다양한 기호나 도상들로 보다 풍요로워졌다. 하지만 입술은 지난 10년간 변함없이 지히 작가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입술이나 하트, 알파벳 등에서 그가 주목한 것은 점(點)과 선(線)이다. 그에게 점은 언어를, 선은 생각을 나타내는 기호로 인식된다.

“점이 제가 했던 말들에 해당된다면 점의 연결로 완성되는 선은 생각의 덩어리가 되죠.”

팝아트적 느낌이 짙은 도상들과 짝을 이루는 것은 화려한 색채다. 삼원색으로부터 파생된 화려한 색채들이 위풍당당하게 존재감을 발한다. 색은 그에게 감정이나 느낌 등의 정서를 대변하는 물성으로 인식된다. “빨강은 욕망, 노랑은 순수한 감정을 대변하죠. 이처럼 다채로운 색채는 다양한 감정들의 조각으로 표현했어요.”

기술의 발전으로 소통의 형태도 비약적인 진화를 거듭했다. 대면 소통과 인터넷을 통한 비대면 소통의 양을 비교했을 때 후자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정도로 사람들은 새로운 소통방식에 환호하고 있다. 하지만 “늘어난 비대면 소통의 양에 비례해서 소통의 질까지 좋아졌느냐?”고 따져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소통의 질은 더 얕고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작가는 바로 이 점에서 비판의 날을 세운다.

“밤새 편지를 써서 몰래 사물함 속에 넣고 오는 감성들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어 단어에서 작가의 비판의식은 더욱 명료해진다. 영어단어는 가까이서 보면 의미에 집중한 듯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선의 조합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런 현상을 통해 고정관념에 생각이 갇히는 현상을 비판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의미들 속에 갇혀서 부자유스럽게 살아가는 것 같아요.”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기록하는 작가 지히.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성찰의 시간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과거에 차마 말하지 못했던 생각들이나 현재의 자신에 대한 성찰, 그리고 미래에 대한 바람까지 아우른다. 이 모든 단계에서 공통으로 개입되는 개념은 소통이다.

만족한 소통을 하고 돌아서면 기분이 좋아진다. 마음에 일말의 미련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가 원하는 소통도 바로 이런 것이다. 그는 언제나 서로의 의사나 강점이 충분히 전달되는 소통을 원했다. 그러나 현실은 늘 아쉬움을 남겼고, 그때마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했다. 그가 얻은 해결책은 ‘내면을 윤택하게 채우는 것’이었다. 내면이 풍요로울 때 자신의 의사를 다양한 측면에서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고, 이는 곧 좋은 소통으로 연결된다는 의미였다.

문제에 대한 진단이 내려지자 작가는 풍요로운 내면상태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주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지식과 감정들을 흡수하려 했다. “나의 내면을 잘 쌓아야 좋은 관계도 만들 수 있다고 볼 때 결국은 나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성찰은 성숙을 부른다. 작가에게도 성찰의 시간은 내적 성장과 결부됐다. 실수나 자기 합리화 등 부정적인 감정들이 성찰의 시간들을 거치면서 긍정으로 치환됐다. 이는 곧 ‘주관성의 객관화’로 이어졌다. 주관적인 감정들이 제3자의 시각으로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상태로 확장된 것.

작가는 이런 상태를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했다. 메타인지는 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하여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ㆍ발견ㆍ통제하는 정신 작용으로,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의미한다. “그림을 통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치유되고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서울옥션의 제로베이스(v8) 작가로 선정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팝아트 화가 중 한 명으로 주목받고 있는 지히 작가의 ‘큐피트전’은 대구 동구 키다리갤러리에서 27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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