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작농의 가을과 머슴의 아침
소작농의 가을과 머슴의 아침
  • 여인호
  • 승인 2022.02.2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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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단을 탈곡기에 댈 때마다 벼 알갱이가 쌓인다. 양 발을 번갈아 가면서 탈곡기를 돌리면서 두 손은 볏단을 이리저리 돌린다. 볏단이 탈곡이 끝나면 짚단이 된다. 짚단은 뒤쪽으로 던진다. 두 분의 몫이다. 너무 많이 쌓이지 않게 다른 곳으로 치운다. 영호의 몫이다. 탈곡기 앞에 벼 알갱이가 수북하게 쌓이면 잠시 탈곡기를 멈추고 갈퀴와 빗자루로 알갱이를 정리한다. 두 분의 일이다. 이 때 영호는 탈곡기 옆에 탈곡할 볏단을 가져다 놓는다. 늦가을의 짧은 해가 뒷산 너머로 사라지고 개와 늑대의 시간이 될 때 탈곡은 끝이 난다.

짧은 저녁 식사가 끝나면 탈곡이 끝난 짚단을 차곡차곡 쌓는다. 어느 정도 높이가 되면 아버지가 낟가리에 올라가고 어머니와 영호는 짚단을 던져서 올린다. 아버지는 짚단을 차곡차곡 잘 쌓았다. 제일 어려운 작업인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초가지붕과 같이 하면 마무리가 된다. 그렇게 늦가을 밤이 깊어갔다. 시골 마을의 모든 집에서 가을 내내 이런 작업이 이어졌다. 부의 상징이었던 낟가리가 지붕만큼이나 생기면 시골 마을은 초겨울이 된다. 영호의 초등학교 고학년 때의 풍경이다.

이런 작업은 우리 집에서보다 다른 집에서 하는 게 더 많았다. 땅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던 두 분은 영호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부잣집의 소작을 했다. 인력과 소의 힘으로 짓는 농사는 부지런함을 몸에 배게 했다. 두 분은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을 증명했다. 두 분은 소작을 하면서도 겸손했지만 당당했다. 특히 아버지는 약간 까칠한 면도 있었다. 어린 영호도 그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시골에서 자란 영호는 어려서부터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시골의 여름은 새벽 4시가 넘으면 시작되는 것의 영향이 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 뒤로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특히 출퇴근 거리가 왕복 100여 킬로미터가 넘다보니 일찍 출근을 할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 출근 시각은 교사, 전문직, 교감, 전문직, 교장을 거치면서도 늘 일정했다. 어떤 직위에 있느냐에 따라서 아침 활동은 조금씩 달라졌다.

지금도 일찍 출근을 한다. 휴대폰의 아침 알람은 4시 44분이다. 가끔씩 늦장을 부리기도 하지만 대부분 알람이 울리기 전에 잠을 깬다. 혼밥인 아침식사를 하고 출근 준비를 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린다. 늦어도 6시 전에 집을 나서면 한 시간 안에 학교에 도착한다. 그래도 누군가 출근을 한 날도 있다. 영호보다 더 부지런하다.

교장실에 들어서면 컴퓨터를 켜고 음악을 틀고 물을 끓인다. 발열체크를 하는 체육관에 불을 켜고, 1, 2학년 교실을 돌아보면서 복도에 불을 켠다. 다시 본관으로 넘어와서 4층까지 다니면서 복도에 불을 켠다. 더운 여름에는 냉방을 하고, 겨울에는 난방을 한다. 다시 교장실에 와서 물을 마시고 글자나 초성이 붙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교장실을 나선다. 교문에 나가서 교감선생님과 아이들 아침맞이가 끝나면 교문을 잠근다. 급식실에 들렀다가 교장실에 도착하면 1교시가 시작되는 8시 50분이 된다. 이게 영호의 아침이다.

영호는 공식적인 직함을 사용할 때 외에는 ‘대구교육대학교대구부설초등학교 제일머슴(교장)’과 같이 머슴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머슴은 ‘주로 농가에 고용되어 그 집의 농사일과 잡일을 해 주고 대가를 받는 사내’라는 뜻이다. 영호는 학교에 고용되어 교육과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 교장이라는 직위에는 직책이 따른다. 영호가 머슴이라고 하는 것은 직책을 다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배려하고 섬기겠다는 것이다. 두 분이 소작을 하면서도 겸손하고 당당했듯이 영호도 머슴의 직책을 다하면서 겸손하고 배려하고 섬기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겠다.



김영호 대구교대대구부설초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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