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넘어 또 천년으로 호명될 성음 (聲音)
천년을 넘어 또 천년으로 호명될 성음 (聲音)
  • 승인 2022.02.2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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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홍란
시인·문학박사
우륵, 그의 이름을 속으로 호명해 본다. 입 속에서 한 현이 일어나 잠자는 정수리를 흔들고, 차가운 영혼을 깨운다. 눈감고 가슴으로 들어보면 우르르릉, 바람 따라 소리의 이랑이 물결진다.

어린 시절은 그의 무릎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다. 읍소재지에 하나뿐이었던 초등학교에서 머지않은 언덕에는 우륵을 기리는 기념탑이 있다. 그곳은 아이들의 텃밭이었다. 선생님은 가끔 햇살 좋은 날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언덕을 올랐다. 햇병아리 같은 아이들은 탑 아래 콩나물처럼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앉아 글짓기를 하거나, 그림을 그렸다. 여기저기 앉은 참새처럼 재잘거리고, 노래를 부르고, 숨바꼭질을 하다가 선생님께 들키면, 저도 잘 모르는 형용사들을 얼른 주워 종이 위에 올려놓곤 했다. 떠들던 아이들이 돌아가고, 해가 저문다. 주변의 온기마저 서서히 수그러들면 우륵의 상징인 가야금탑은 구름, 새, 꽃들을 거느리고 하늘로 솟아올라 거대한 가야금으로 되살아나곤 했다. 오늘, 그 무릎 아래 서서 눈이 시리도록 탑을 올려다본다.

선생님은 음유시인이자 재야학자였다. 역사적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고대사, 우륵과 가야금, 대가야의 패망사, 근대 한국사를 비롯해 우주의 원리 등을 실감나게 들려주셨다. 말씀은 아이들의 뇌리에서 또 한번 회전하여 살아나곤 했다. 촘촘히 집들이 들어선 우리 동네 고아리(古衙里)는 대가야의 관청이 되고, 이웃한 쾌빈리(?賓里)는 각 나라의 사신을 접대하거나 묶던 여객이 된다. 길 건너 연조(延詔)에 이르면 불현듯 가야 병사들이 성문을 열어주고, 왕의 서찰을 받든 대신이 나타난다. 왕의 가솔들이 물을 마셨다는 우물에서 왕을 영접하고, 언덕을 넘어 산길로 접어든다. 주산 산꼭대기에 봉긋이 왕들이 누운 고분이 나타난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의 참배를 받은 날의 왕들은 오랜만에 지기라도 만난 듯 대가야 흥망 이야기에 응수를 하는지 봉분은 높고 둥글었다.

우륵(于勒)의 이야기는『삼국사기』, 『신라본기』, 및 『잡지』등에 전해지고 있다. '우륵은 성열현(省熱縣)의 사람이다. 그는 대가야 가실왕(嘉悉王)의 부름을 받고 궁중의 악사가 된다. 가실왕은 중국의 쟁(箏)을 바탕으로 가야국의 정신이 담긴 독특하고 유일한 악기인 가야금을 만들고, 우륵에게 12개 지역에 해당하는 12곡을 짓게 하였다'고 전한다.

선생님은 기록을 넘어 글자와 글자 사이의 숨소리를 읽을 줄 아셨다. 분명, 가실왕의 명을 받든 우륵의 눈은 별빛이었다. 우륵은 왕의 아정(雅正)한 생각을 되뇌이며, 죽어서도 천년을 산다는 오동목을 찾고 찾아, 위는 하늘을 본 따 둥글게 빚고, 아래는 땅처럼 평평하니 다듬었다. 1년 열두 달을 나타내는 현주(絃柱)는 기러기 모양으로 새겨 앉히고, 명주실을 꼬아 얹어 12현금을 만든다. 우륵은 손수 만든 금을 끌어안고 열 손가락에 피멍이 맺히도록 연주하는 나날이 많았다. 그 소리는 골골이 정정정 울려 퍼져 옛 가야 사람들의 마음을 쓰다듬었으리. 악(樂)으로써 대가야 세력의 결속을 도모하려한 왕은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며 그 곁에 있었을 터이다.

가실왕과 우륵은 대가야의 중흥을 위해 가야금을 만들고, 민심을 다스리기 위해 음악을 만들었다. 그러한 노력은 오히려 신라에서 꽃으로 피어 열매 맺는다. 대가야 멸망 후 신라 진흥왕은 대가야의 음악을 수용한다. 물론 신라의 토속 음악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신라는 정치적 통합을 노래하는 선진 음악을 대가야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다. 진흥왕은 볼모로 끌려온 노예에 불과한 우륵의 품에 가야금을 안겨주고 연주와 작곡을 하게 한다. 아울러 그의 음악을 국가 대악(大樂)으로까지 삼았다.

대가야를 순례하고 돌아오는 내 발자국에는 오동향이 스미었다. 당시 대국의 압박과 강탈 사이에서 고심이 깊었을 대가야국 가실왕이『삼국사기』에서 되살아나 던진 질문을 새긴다.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르니 성음(聲音)이 어찌 한 가지일 수 있겠는가?" 몇 밤이 지나고 우리나라의 대통령으로 선택된 분에게서도 너그럽지만 결단력 있고, 국민이 즐겁게 꿈을 펼칠 수 있는 공간과 이름만 되뇌어도 즐거워지고, 천년을 넘어 또 천년으로 호명될 성음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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