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좋지 아니한家] 차례상은 누가 차려줬나요?
[백정우의 좋지 아니한家] 차례상은 누가 차려줬나요?
  • 백정우
  • 승인 2022.03.03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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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좋지아니한가
영화 ‘큰엄마의 미친봉고’ 스틸컷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경제적 인간의 합리적 선택이 공공의 이익에도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자기 이익을 위해 산다는 전제로 시작하는 학문이 경제학이다. 그로부터 240년이 흘러 여성경제학자 카트리네 마르살은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라며 해묵은 경제이론을 논쟁의 장으로 끌고 나온다. 애덤 스미스는 평생 혼자 살았다. 그러니까 나이 먹은 아들을 위해 스테이크를 굽고 저녁을 장만한 노모와 누이의 헌신 없이 어떻게 저녁을 먹을 수 있었겠느냐는 항변이다.

영화의 배경은 명절 차례를 앞둔 유씨 가문의 큰집. 이 집안, 조상 대대로 정승·판서를 배출한 엄청난 가문인가하면, 그렇지 않다. 며느리에 손자까지 모두 모여 봐야 열댓 명이 고작이다. 한 눈에 봐도 대가족이 아닌 구성원을 선택한 건 크나 작으나 가족과 문중의 이름으로 동맹을 맺은 남성들의 구태를 전시하려는 의도였을 터. 백승환 감독의 ‘큰엄마의 미친봉고’이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유씨네 남자도 마찬가지), 여성의 노동은 자본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래서 여성은 경제적 인간이 아니다. 이득이 되지 않으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야 경제적 인간인데, 희생과 헌신으로 가정을 돌본 여성의 노고를 남자들이 알아줄리 없다. 잘못 됐다면 바꿔야 한다. 큰엄마가 동서들과 조카를 데리고 집에서 탈출한다. 차례 상차림 파업이다.

큰엄마와 며느리들이 집을 떠나자 남자들은 속수무책이다. 심지어 작은엄마와 조카의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 취급 받아온 여성들의 반란이 설득력을 얻는 건 당연지사.

그날 밤, 바닷가 모닥불 앞에 모여 앉은 며느리들은 자기 이름을 알린다. 오랜 세월, 가족과 가문 아래 접어두었던 원래의 모습. 누구 엄마로 살았고 첫째 둘째...며느리로 불렸던 그녀들이 빛나는 자기정체성(누군가의 롤 모델이었고, 공대의 전설이었고, 똑 부러지는 커리어우먼인)을 수줍게 드러낸다. 이름을 얻어 고유성으로 진술하는 여성을 그린 황정은의 ‘연년세세’에서 여성은 순자와 이순일과 한세진과 하미영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사람들이 이 소설을 가족의 이야기로 읽을지 궁금하다고 했다. 작가의 통찰이 빛나는 지점이다. 가족 내에서 남자는 이름으로, 여자는 엄마와 누나와 고모로 불리는 게 당연하다 여기며 살아왔으니까. 여성의 이름을 찾아주려는 황정은의 소설을 백승환 감독이 읽었는지도 모른다. 소설과 묘하게 맞닿아 있는 며느리들의 바닷가 장면은 그래서 영화의 백미다.

가족 테두리에서 숭고한 노동의 역사를 써온 며느리와 여성들이었다. 장손과 종손과 사내들의 천국에서 자신들을 남 취급해온 조상의 차례 상을 차린 그녀들이었다.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전통과 습속에 매어 남자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해온 이 땅의 여성들은 묻는다. 조상님, 여태 차례 상은 누가 차려줬나요? 돈 한 푼 받지 않고.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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