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살아야 지방이 산다] 근현대 역사 흔적 품고 있는 영주시 영주1동, 주요 도시로 이어지는 교통 거점…근대문화 관문 역할
[마을이 살아야 지방이 산다] 근현대 역사 흔적 품고 있는 영주시 영주1동, 주요 도시로 이어지는 교통 거점…근대문화 관문 역할
  • 김종현
  • 승인 2022.03.2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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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영주군세일반지도
1927년 당시 영주읍내 지도.

지난 9일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가 전국에서 솟아 오르고 있다.

선거기간 동안 새로운 시대에는 지방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았다.

지방이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작은 단위의 마을이 살아야 하고 마을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터전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다. 대구신문은 새 정부 출범을 맞아 대구·경북의 마을에 담긴 숨은 이야기를 월 1회 연속 기획으로 연재한다.

마을에 대한 아카이빙 활동을 하고 있는 지방분권운동대구경북본부 부설 ‘마을문화연구소’ 연구진들이 근대화 이후 변화를 겪고 있는 대구와 경북의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마을은 일상생활을 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간으로서 자치의 기초 단위이기도 하다. 이러한 마을이 인구감소와 도시화의 과정에서 오래전부터 무너져 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마을이 가진 기억과 기록도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마을의 공동체성을 기억하고, 또 회복하기 위한 중요한 방안이 마을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마을에 관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기록하여 공유하는 활동은 마을의 정체성 확립과 자치역량 강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근현대 역사의 중심 영주1동

전근대 영주의 중심은 영주1동이었다. 조선후기 이래로 여러 관청이 밀집된 곳이었으며, 풍기, 순흥, 봉화, 안동, 예천 등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거점이었다.

이러한 영주1동 일대의 변화는 한말 이 지역의 의병활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본군수비대를 설치하면서 나타났다. 이후 헌병대, 군청 등 식민지배기구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식민지 시기에도 이 마을은 충북과 경북, 강원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주목되면서 발달하였다. 법원 출장소, 금융조합, 축산조합, 건견장(누에고치 사육장), 보통학교, 여자양잠전습소, 면사무소 등 각종 공공기관들이 설치, 운영되었다.

◇근대한옥과 철도관사가 있는 관사골(두서마을)

영주1동 가운데 일제강점기 중앙선 건설과정에서 생겨난 철도관사가 남아 있는 곳이 옛 두서마을이다. 조선 초기 수양대군의 단종폐위에 반발하여 처가가 있던 이 마을에 정착한 선비가 이진이었다. 그 집안의 후손 가운데 중종 대에 명의로 이름을 떨친 이석간이 있다. 이석간은 1534년(중종29) 전옥서 참봉을 맡았으나 이내 벼슬을 그만두고 영주에서 활동하였다. 위독해진 퇴계 이황의 진맥을 담당하고 약을 제조하기도 하는 등 의술로 이름을 떨쳤다. 이석간의 의술은 후일 ‘이석간경험방’으로 전해졌다. 또한 명나라 황태후(皇太后)의 괴이한 병을 고쳐주고, 황제에게 하사받았다는 아흔아홉 칸의 고택은 6.25전쟁 때 까지 종가로서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이후 규모가 축소되어 일부만 남아 있다.

이러한 두서마을을 지금은 관사골이라고 부른다. 일제 말 중앙선 건설과정에서 조성된 철도관사의 일부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관사의 크기는 직급에 따라 달랐으며, 당시로서는 실내에 화장실과 목욕탕을 갖추고 있어 영주에서는 가장 좋은 집들이었다고 한다.
 

1958년-철탄산배경-영광중학교앨범
1958년 철탄산배경 영광중학교 앨범.

◇역사와 아픔을 간직한 숫골

영주제일교회 뒤편 철탄산으로 오르는 골짝과 산비탈 전체를 ‘숫골’이라 부른다. ‘숫골’이라는 이름은 해방 이후 전쟁의 피해를 입고 귀국한 이른바 ‘전재민’들을 위한 수용소가 설치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들 전재민들을 위한 수용시설이 1947년 철탄산 자락에 마련되었다. 당시 건립된 수용소의 규모는 초가연립주택 5동에 30가구 정도 되었다고 한다. 문을 열면 부엌이 있고, 방이 한 칸, 툇마루가 있는 구조인데, 일렬로 붙은 구조였다. 이후 수용소를 철거하고 철탄아파트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숫골의 또 다른 유래는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 지역이었던 이곳에서 고구려군과 신라군이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군대가 주둔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즉 군대가 주둔한 곳을 ‘술골(戌谷)’이라 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이 변해 ‘숫골’이라 되었다는 유래도 전해진다.

◇근대 영주의 ‘이발업’과 영광이발관

한말 단발령 선포 이후 생겨나기 시작한 조선인 대상의 이발관은 근대문화의 상징 가운데 하나였다. 영주지역에서는 1927년 6월 5일 영주이발조합이 결성되어 활동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발조합은 1930년대 영주이발동업조합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영주지역 이발업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 영광이발관이다. 영광이발관의 이야기는 지금 위치의 건너편에 있었던 국제이발관에서 시작된다. 지금의 광복로 남쪽 도로변에서 ‘국제이발관’이 1930년대 등장하였다. 해방 후 국제이발관은 기독교인이 인수하면서 시온이발관으로 변경되었고, 1970년 광복로 도로 확장과정에서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 지금의 경영주가 인수하면서 이름을 영광이발관로 고치고 지금까지 50년 넘게 영업을 계속해 오고 있다,

◇광복로의 정미업과 풍국정미소

교통의 요충지였던 이 마을은 경북 북부지역 미곡유통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던 곳이다. 1930년대에는 영주 유지들이 경영하였던 정미소가 광복로 일대 약 30개가 있었다. 이러한 광복로 일대 정미업의 기억을 담고 있는 곳이 풍국정미소이다. 풍국정미소는 일제 강점기인 1940년경 설립되어 6.25전쟁 때 잠시 멈춘 것 외에는 계속 운영되었다고 한다. 당시 주변에는 협동정미소, 남부정미소, 북부정미소라고 있었으며, 영주제일교회 정문 옆(현 주차장)에도 정미소가 있었다. 풍국정미소는 영암선 개통 이후 경북 북부와 강원도 남부 탄광지대에 식량을 공급하는 거점으로서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이러한 풍국정미소를 통해 이 지역의 양곡가공업과 양곡유통의 역사, 정미소의 건축형식과, 설비구조 등과 저울 등의 기구를 둘러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영주의 근대문화 발전과 영주제일교회

1909년 설립된 영주제일교회는 영주의 근대화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청년단체나 경제계의 주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강명여숙을 설립하여 여성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아동교육을 위해 유치원을 설립, 운영하였다. 영주기독청년회가 조직되어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음악, 미술, 연극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지역민들에게 근대문화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김진호 목사 등이 적극 저항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6.25 전쟁 이후 낡은 교회 본당 목조건축물을 새로 건축하였다. 1954년 교인들이 직접 건축자재를 운반하는 등 적극 동참하는 가운데 전개된 건축공사는 1958년 7월 25일에 이르러 석조의 교회당을 완공하였다. 영주지역의 대표적인 교회의 본당이고, 유일한 서양의 고딕식 건축양식을 차용한 절충양식의 근대건축물로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근현대 영주의 변화를 간직하고 있는 영주1동의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2018년 문화재청으로부터 목포, 군산지역과 함께 ‘선(線)·면(面)’ 단위 문화재 등록제도를 통해 국가등록문화재 720호로 지정돼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입체적인 보존과 활용 방안을 통해 새로운 명소로의 변화를 도모하고 있다.

글=송호상 (동양대/마을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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