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동그라미
[달구벌아침] 동그라미
  • 승인 2022.03.27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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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며칠 남지 않은 3월의 달력을 떼 낸다.
새로 드러난 4월의 달력 위에 아들이 보인다. 그는 내 삶을 빛나게 하는 보석이며 오늘을 지탱하게 만드는 기둥이다. 봄날 오후의 햇살처럼 생각만 스쳐도 가슴 언저리가 뭉클해지고 뜨거워지는 깊은 그리움이다. 플라타너스 무성한 잎들이 넉넉하게 만들어 놓은 그늘과 같고 수북한 달빛을 얹어 놓은 생의 언덕이다.
몇 해 전 4월, 아들은 군에 입대 했다. 21개월의 군 복무 기간을 채우려면 일 년 열두 달이 지나고 아홉 달을 더해야 한다. 어떤 이는 예전의 33개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국방부의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돌아간다'는 말을 빌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아들을 향한 그리움과의 전쟁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언제 끝날지도 모를 까마득한 두려움의 시작이었다.
4월의 달력이 눈 앞에 펼쳐진다. 6일이란 숫자 위에 숨이 멎는다. 붉은 색연필로 그려진 동그라미 하나가 내 뜨거운 심장 속으로 황급히 뛰어든다. 일 년 중 태양이 가장 높이 뜨고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의 해처럼 환하고 뜨겁게 빛이 난다.
"아들 면회"
주말이라야 외박 신청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때마침 그날은 아들의 생일이었다.
"그 먼 데까지 가려고?"
시퉁하게 던진 남편의 말속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배여 있다.
"그럼, 군대 들어가서 맞이하는 첫 생일인데······. 남자들 제대하고 나면 그쪽으로 보고 오줌 누지도 않는다던데, 군대에 있는 동안 행복한 추억 하나쯤 만들어 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마냥 들떠있는 내 마음 뒤란으로 남편의 심연 속 그리움 한 무더기가 폭설 같이 울컥, 들이친다.
결혼 전 남편은, 군 복무 중에 아버지를 잃었다. 석가탄신일 행사로 수만 개의 연등이 거리를 밝히던 때, 시아버지는 저무는 석양처럼 홀로 이승을 밀어내고 말았다. 남편은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훈련 중에 들었다고 한다. 어떻게 집을 찾아올 수 있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꿈이길 바라는 맘으로 비몽사몽인 채 한걸음에 내달려 겨우 집에 도착했지만 끝내 시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볼 수 없었다고 했다.
기차와 버스를 몇 번이고 갈아탄 차 안에서도 나지 않던 눈물이 대문 앞, 외등처럼 쓸쓸히 내걸려 있는 붉은 조등을 발견하고서야 활화산처럼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아들 향한 그리움이 죽어서도 눈 감지 못한 채 뜬눈으로 버티고 있었다. 슬픔이 용광로처럼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웠던 것일까. 그는 이내 실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목젖까지 차오른 슬픔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려니 급체라도 한 듯.
영정 속, 아버지의 모습이 꽃등처럼 붉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남편의 눈으로 처음 들어온 것은 달력이었다. 남편이 입대한 날부터 하루에 하나씩 재개발구역 대문마다 그려진 곱표처럼 붉은 동그라미 속 숫자들 위에 가위표 쳐진.
'사랑한다는 말 한 번 전하지 못한 것이 그의 가슴 깊숙이 비수처럼 꽂혀 한으로 남았다고 해를 거듭할수록 사월이 오는 게 두렵다'며 말끝을 흐린다. 영국 시인 엘리엇(T. S. Eliot)의 황무지 첫 구절처럼 남편의 기억 속, 4월 역시 가장 잔인한 달이 되어 있었다.
며칠 남지 않은 3월의 달력을 떼어내고 서둘러 4월의 달력 안으로 달려가던 내 마음이 시아버지의 동그라미와 오버랩 된다. 무사 귀환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동그라미 하나씩 그려 나가는 일이 꿈에도 그리던 아들에게 달려가는 행복의 지름길이었으리라. 시아버지가 그랬듯 우리 부부 역시 그렇게 기다림의 시간을 앞당기고 싶은 마음에 황급히 새날의 달력 속으로 내달려 본다.
동그라미를 그려 나가는 것으로 수많은 불면의 밤들을 견뎌내듯 새롭게 펼쳐진 달력 속에서 시아버지의 그리움은 더는 굴러가지 못한 채 머물고 말았지만 우리는 여벌이 없는 생의 성긴 가슴으로 아들에게로 달려간다. 문만 열면 별이 돋아나고 언덕으로 올라서면 멀리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 그리움의 동그란 흔적처럼.
남편의 달력 위 붉은 동그라미 속으로 저만치 영내를 빠져나온 아들의 얼굴이 봄 햇살처럼 붉게 물들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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