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칼럼] 4월이 잔인한 이유
[의료칼럼] 4월이 잔인한 이유
  • 승인 2022.04.03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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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미 대구시의사회 부회장·마음과 마음정신건강 의학과의원 원장
엘리어트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듯이, 정신과의사도 4월은 무척 힘든 달이다. 청교도적이고 결벽증적이었던 그는 4월의 춘정에 들뜬 남녀의 도덕적 타락 때문에 4월을 혐오했다. 성행위가 불결하다고 평생 부부관계도 하지 않았던 그가 아닌가.

어제는 병원 대기실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진료를 마치고 나간 젊은 여성이 병원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눈물을 흘리다가 급기야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다른 환자분들이 하나둘씩 따라 울기 시작했다. 훌쩍거리다가 꺼이꺼이 울고 어떤 분은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울었다. 의사나 간호사나 이 사태가 난감했다. 단체로 달래기엔 역부족이어서 순서대로 한분씩 불러들였다.

‘왜 우셨어요?’

저 사람이 우는 걸 보니 내가 힘들었던 시절이 생각나서요.

탈북민인 이 여성은 중국에서 차마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트라우마 기억이 떠올라서 따라 울었다는 것이다. 한참을 울었다.

‘할머니는 왜 우셨어요?’

아직 어린 저 아가씨가 얼마나 힘들면 쓰러지겠노. 우리 딸이 생각나서. 저 나이에 세상을 떴지.. 그러시곤 한참을 우셨다.

정신과는 봄이 가장 힘든 시기다. 겨우내 겨울잠 자듯 사건사고 없이 고요하게 보내다가 꽃 피는 봄이 오면 환자들 상태가 갑자기 나빠진다. 새벽에 일찍 깨어 다시 잠들기 어렵다는 사람이 많고, 새벽 여명에 아버지 산소를 다녀왔다는 남자도 있다. 남자들은 세상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아버지를 떠올린다. 봄기운이 기승을 부리면 감정이 요동치고 정신과 입원 병실은 만실이 된다. 감정은 오미크론 보다 전염력이 커서 가까이 있는 사람을 감염시키고 아프게 한다.

우울증은 인류를 괴롭히는 무서운 질병 중 하나다. 여성의 뇌가 슬픔에 더 민감하고, 호르몬의 변화가 감정에 영향을 주어 여성이 우울증이 더 많다. 여성은 감정 신호에 예민해서 스스로 병원을 찾는 경우도 더 많다. 반대로 남자들은 우울한 기분을 실패감과 연결시켜서 아주 힘들 때까지 부인(denial) 하고, 버티고 가족과 자녀가 살아갈 방법까지 준비해두고 진료 받으러 오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우울증에 대한 신경학적 원인들이 밝혀지고 있지만 정신분석학적인 원인도 간과할 수 없다.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은 자존감의 붕괴에 있다. 튼튼한 정신 구조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만들어진다. 기초가 약하면,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듯이 사소한 일에도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둘째는 남에게 화를 내지 못하면 우울해진다. 상대방에게 쏠 화살을 방향을 바꾸어 자기를 향하게 할 때 우울해지고 외부적 관심을 접어버리게 된다. 우울증 환자의 끊임없는 자기 비난은 상대에 대한 증오가 자기를 향한 것이다. 셋째 자존심을 유지시켜 주던 중요한 대상을 잃게 되면 우울해진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중년 남성이 불안하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진료실을 찾았다. 돈도 많이 벌었고 자녀도 잘 자랐고 닥친 우환도 없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 것일까. 원인은 유기 불안(abandonment anxiety) 때문이었다. 혼자 남게 되는 것에 대한 가상의 두려움이다. 아내와 매일 산책하고 같이 밥 먹고 여행하고 항상 같이 지냈는데, 혹시 아내가 병에 걸려서 죽으면 어쩌지? 난 혼자 어떻게 살아가지? 아내는 외부 세계와의 연결 고리이자 친구이자 아내이자 경영 관리자였고 마음의 주인이었다. 특히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면서 아내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 남성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성취를 중시하는 사회는 우울감 같은 감정을 사치로 여기고, 그가 누구인가 보다는 그의 역할에 치중하기 쉽다. 이름보다는 직함으로 불리고, 죄수는 번호로 불리고, 아이디나 닉네임으로 기억하고, 은행을 가도 13번 손님~ 병원을 가도 ‘환자분~’ 익명의 생물체는 끊임없이 교체된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는 매일 많은 꽃을 피울 수 있고, 세상과의 끈이 약해진 분들에게 생명의 마지막 고리가 되어줄 수 있는 의사이기 때문에 두렵지만 조심스럽게 4월을 마주한다. 벚꽃 엔딩을 들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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