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좋지 아니한家]봉순씨의 생산적 활동을 지지하는 이유
[백정우의 좋지 아니한家]봉순씨의 생산적 활동을 지지하는 이유
  • 백정우
  • 승인 2022.04.14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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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칼럼
'경축! 우리사랑' 스틸컷

불륜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여성을 이중 억압함으로써 남성가부장제를 강화하는데 기여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바람난 여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내거나 단죄함으로써 가족과 가정 복원을 기치로 삼아왔다는 것. 중견배우 김해숙의 첫 주연작인 ‘경축! 우리사랑’을 여성 욕망에 관한 빤한 판타지일 것이라고 예단한 것도 그간 여성의 성적욕망을 다뤄온 불편한 관행과 무관치 않다. 게다가 오점균 감독의 전작들을 모두 본 마당에 달리 새로움을 기대할 것이 없다는 생각도 일조했다. 그러나! 영화는 중년여성의 성적욕망을 통해 생산적 활동을 기피하는 남성들을 질타하고 있었다.

오점균 감독의 ‘경축! 우리사랑’은 어느 변두리, 그러니까 미용실에서 머리할 여유는 고사하고 모여앉아 인형 눈깔을 붙이거나 봉투 붙이는 부업이 여전한, 재개발을 앞둔 추레한 동네를 배경으로 한다. 그 속에서 봉순의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는데, 통념을 파괴할 뿐더러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봉순의 늦바람이 질풍노도처럼 동네를 휩쓸고 러브바이러스가 구성원들에게 전파되어 유치한 판타지를 꽃피우는 가운데 생기는 한 가지 의문. 도대체 쉰 줄에 접어든 이 여자는 왜? 스무 살이나 어린 남자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을까.

일단 등장인물을 보자. 하숙을 치고 노래방을 운영하는 봉순 씨가 있고 그녀 집에서 하숙하는 세탁소 주인 구상이 있다. 여기에 봉순의 남편의 정부이자 미용실 주인인 젊은 여자 정도면 인물 소개는 끝난 듯하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다른 인물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봉순의 딸도 봉순의 남편도, 허구헌날 그와 술 대작을 벌이며 놀기 바쁜 뭇 사내들도 마찬가지다. 하나같이 소비적 활동에만 몰두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봉순이 연정을 품은 사내가 동네에서 유일하게 생산적 활동에 매진하는 구상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어머니와 아내로 통칭되어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온 봉순의 일탈과 욕망성취 과정의 파격성이 불쾌할 이유가 없는 건 이 때문이다.

유사한 소재를 가진 영화들이 놓친 것, 이를테면 한 여성에게서 희생과 인내의 삶을 제거했을 때 여성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부재라는 한계를‘경축! 우리사랑’은 가뿐하게 돌파한다. 철없는 중년여성의 욕망성취라는 진부한 내러티브를 넘고, 가부장제마저 격파하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영화 후반, 우리는 해묵은 명제와 마주한다. 가족의 이름으로 여성을 묶어두려는 여전히 견고한 가부장제가 그것이다. 예컨대 봉순이 생산한 잉여물을 무상 소비하던 남편과 딸은 “우리가 엄마를 이해해야”한다며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해피엔딩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관객들이 헛웃음을 지은 이 장면은 사뭇 시사적이다. 오랜 시간 봉순을 흡혈하던 가족들이 졸지에 피해자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추락한 비생산자의 처량한 처지를 특정한 이 장면은 여성주체가 넘어야할 견고한 가정의 벽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경축! 우리사랑’은 중년여성의 단순한 일탈기가 아니다. 남편의 외도에 맞바람으로 맞서는 즉흥적 로맨스도 아니요 그렇다고 성욕을 주체할 수 없어 젊은 사내의 품을 파고드는 도화살 낀 여자의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요컨대‘경축! 우리사랑’은 성적담론을 제거하고도, 그 범위와 공간을 가정 안으로 한정시켜 놓고도, 여성의 인정투쟁이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 드문 사례가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봉순 씨의 생산적 활동을 지지하는 이유이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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