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살아야 지방이 산다] 민족적 위기때마다 책임 다하고 代 이어 효행
[마을이 살아야 지방이 산다] 민족적 위기때마다 책임 다하고 代 이어 효행
  • 김종현
  • 승인 2022.04.2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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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충효(忠孝)마을로 소문난 고령군 도진리
도진충효관개관기념사진
도진충효관 개관 기념사진. 

고령박씨, 650년간 살아온 곳
1350년 박경 입향 후 본향 이뤄
박형, 삼포왜란 토평에 공 세워
임진왜란·정유재란 때도 큰 공
해방 이후 건국에 기여 하기도

◇무릉도원과 비슷한 도원리 -도진리

고령군 대가야읍에서 개진면을 지나 모듬내(회천) 변으로 난 지방도 67호선을 따라오면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의 도진리(桃津里)에 이른다.

낙동강의 지류인 모듬내변에 자리 잡은 도진리는 특히 고령박씨들이 650여 년간 터를 잡고 살아온 곳으로 유명하다. 고령박씨가 처음 마을에 정착했을 때부터 마을 앞을 휘감아 흐르는 모듬내 변에는 복숭아밭이 우거져 있어 봄이면 복숭아꽃이 만발하였다. 이 때문에 마을 이름을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과 흡사하다고 하여 ‘도원(桃源)’이라 했다고 전한다. 또 도진리에서 모듬내를 건너 야정과 속리, 대곡, 사전리 쪽으로 가는 나루터가 있다고 하여 ‘도진(桃津)’이라고도 불렀다.

이처럼 고령박씨들은 도진리를 복숭아꽃 피는 무릉도원의 ‘도(桃)’자와 모듬내를 건너는 나루터 ‘진(津)’자를 합하여 ‘도진’이라 부르며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진리를 강변의 무릉도원으로 자부했다. 실제로 19세기 초반까지 도진리는 마을 앞으로 흐르는 모듬내 강변 십리에 걸쳐 늘어선 복숭아나무에 붉게 핀 꽃이 강변의 물 위에 비치는 모습이 마치 신선이 사는 무릉도원과 진배없었다. 그 후 1970년대까지 청룡산 아래에서 모듬내 강변까지 복숭아나무가 군집을 이루고, 마을 북쪽으론 강버들이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 강변에 제방을 축조하면서 복숭아나무는 자취를 감췄지만 도진리는 지금도 고령박씨들에게 여전히 강변의 무릉도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도진마을은 고령박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고려 후기인 1350년(충정왕 2)경 박경(朴景)이 입향한 이후 고령박씨의 본향을 이뤘다. 이후 도진리의 고령박씨 문중은 지금까지 650년간 이곳에서 세거해 오고 있는데, 이 때문에 도진리 박씨들은 다른 문파와 구분하여 자신들을 특별히 ‘도진박씨’라고도 부른다. 도진박씨는 개실마을의 선산김씨‘일선김씨’, 관동의 성산이씨 등과 함께 고령 지역의 대표적인 문중으로 꼽히는데, 이 중에서도 가장 먼저 고령에서 터를 잡은 유서 깊은 문중이다.

고령박씨는 부창정공 박환의 8세손인 소윤공(少尹公) 박경(朴景)을 입향조로 하고 있다. 박경이 사재감소윤(司宰監少尹)을 역임한 후 고려 후기인 1350년경 도진리를 개척한 후 파조를 이룸으로써 도진리는 고령박씨 소윤공파(少尹公派)의 본향이 되었다. 이후 고령박씨 소윤공파는 16세기에 들어와 다시 세 개의 지파로 나뉜다. 즉, 박경의 5세손인 박계조(朴繼祖)의 큰아들 박윤(朴潤)의 죽연파(竹淵派)-또는 장파, 둘째 아들 박일(朴溢)의 양자인 박정번의 학암파(鶴巖派)-또는 중파, 셋째 아들 박택(朴澤)의 낙락당파(樂樂堂派)-또는 숙파로 갈라진 것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이 세 지파의 후손들이 도진리에 정착하면서 선조의 유업을 이어 나가고 있다.

고령박씨가 고령을 대표하는 재지 사족으로 성장한 것은 1455년 박경의 증손자 박형(朴炯)이 세조의 원종공신이 되면서부터였다. 박형은 세조 때 상호군으로 재직하면서 정난원종공신(靖難願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이때 국가로부터 집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고, 후손들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특혜를 부여받았다. 박형의 아들 박계조(朴繼祖)의 이름을 세조가 지어 줄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밀접했다. 박형은 무과에 등제하여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우기도 했으며, 사후에는 국가로부터 용비(龍碑)를 하사 받았다고 한다. 그 뒤 16세기 중반에 박형의 손자인 박윤(朴潤) 형제가 조식(曺植)·배신(裴伸) 등과 사우 관계를 맺으면서 사족으로서의 입지를 다져 나갔다.
 

박윤, 선조 때 ‘정려 복호’ 돼
박태중 3대 귀감 ‘효행청여정문’

◇국난극복에 앞장선 도진박씨(고령박씨)

이처럼 도진박씨(고령박씨)는 학문적인 능력과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고령 지역의 향촌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영도적 위치에 설 수 있었다.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과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에는 박정번·박정완(朴廷琬) 형제와 그 자제들인 박효선(朴孝先)·박광선(朴光先)·박원갑(朴元甲) 등이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도진박씨 인물들은 민족적 위난기마다 재지 사족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던 것이다.

17세기 전반에 박종윤(朴宗胤)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광해군 때에는 이조전랑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1623년) 후 이이첨(李爾瞻)의 대북(大北) 정권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귀양 갔다가 고령으로 낙향하고 말았다. 이후 도진박씨는 중앙 관계로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고령 일대에서 재지사족으로서의 지위를 꾸준히 지켜 나왔다. 그러다가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에는 박기열(朴基烈)이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하고, 박재필(朴在弼) 등은 3·1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해방 후에는 박경점(朴庚占)이 건국에 기여한 공로로 광복장을 수여 받았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박수헌(朴壽憲)은 동부전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도진박씨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의 국난 시에는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에까지 이어져 국가에 위난이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해 충(忠)을 실천했다.

이와 같은 충절에 못지않게 도진 사람들의 효행도 대를 이어 가며 전승되었다. 중시조의 13세손인 박윤(朴潤 1517~1572)은 노모에 대한 효행으로 선조 때에 정려 복호(呈閭 復戶)됐으며, 그의 아우 박택(朴澤 1521~1566)도 마찬가지로 지극한 효자였다. 17세손 박사전(朴思全)의 부인 함안조씨(1641~1717)는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단지수혈(斷指受血)을 했으며, 20세부터 수절하여 30여 년간 시모를 정성들여 봉양했다. 이에 지역 유생들이 장계를 올려 경종 대에 효부 열녀로 정려 복호되었고, 효행의 행장문이 지금까지 전해짐은 물론 마을에 열부(烈婦)의 비도 세워졌다.

또한 3대에 걸친 효행이 지역 사회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17세손인 박태중(朴泰重 677~1729)과 그의 아들 박섬(朴暹 1696~1761), 손자 박사연(朴師淵 1732~1776) 등으로서 인근 고을 100여 명의 선비들이 정부에 3대 ‘효행청여정문(孝行請閭呈文)’을 올리기도 했다.

26세손인 박기언(朴基彦 1891~1956)은 21세 때 노모가 학질에 걸려 사경에 이르러 온갖 치병 노력에도 차도가 없자, 인육이 양약이라는 말을 듣고 심야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쇠고기라 속이고 노모에게 드려 병을 낫게 했다. 그의 사후 군내 유생들이 효행을 칭송하고 이를 본받고자 무본계(務本契)를 모아 추모했으며, 효행비도 세웠다. 27세 손부인 순창설씨(설옥순, 1942~)는 신혼 초 시아버지가 중풍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하고 이어 시어머니도 안질을 앓아 실명하자 30여 년 동안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피고 봉양했다.

이러한 효행으로 설옥순 씨는 1995년 대통령으로부터 효부상을 받았다. 28세 손부 영월엄씨[엄상암, 1933~]는 19세에 결혼했는데, 당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목덜미 발치(拔齒)와 풍단(風丹) 병을 각각 앓고 있었다. 엄상암 씨는 발치는 환부를 입으로 빨아내고 풍단은 인분 약으로 치료하여 호전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편(박태균)이 폐병에 걸리자 포목 행상으로 가정을 돌보며 수십 년 동안이나 병 구환에 정성을 다하였다. 이러한 효행으로 엄상암 씨는 1982년 고령군수 효부상과 고령박씨 종중 표창을 받았고, 1984년에는 고령군노인회지부 효행상도 받았다.
 

1997년 7월 충효마을로 지정
지정비 세우고 충효관도 건립
선조들 남긴 유물·자료 등 전시

◇충효마을의 역사 대대로 이어져

이와 같은 충효일본(忠孝一本)의 덕행을 인정받아 도진리는 1997년 7월 13일 경상북도 충효마을로 지정되었다. 그리하여 충효를 실천한 선조들의 배향 재실을 재정비하고 도진리의 역사와 충효 내역을 기록한 충효마을 지정비가 세워졌으며, 관련 자료 17점을 경상북도 지정 문화재로 등재할 수 있었다. 도진마을 사람들은 선조들의 이러한 충효 정신을 더 널리 알리고 선양하기 위해 2005년 도진충효관(挑津忠孝館)을 건립했다.

도진충효관은 2층의 콘크리트 건물인데, 44평(145.45㎡) 정도 되는 1층은 마을회관으로 활용되고, 20여 평(66.12㎡) 정도의 2층은 도진리의 충효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충효관에 전시, 보관된 유물들은 고령박씨 문중에서 전해 오는 각종 고문서와 문집, 현판과 목판 등이다. 고문서는 각종 재산 상속 문서인 분재기(分財記)와 교지(敎旨)들이다. 이 외에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창의(倡義) 기록과 문연서원(文淵書院) 관련 유물, 무공 훈장, 참전 기록, 효행 청려 정문(孝行 請閭 呈文), 효행 표창 등 선조들의 충효 관련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처럼 도진충효관에는 조선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도진리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고령박씨들의 충과 효의 역사를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들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이들 유물은 고령박씨 일문(一門)의 보물에 그치지 않고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이다. 도진리 사람들의 이러한 충효일본 정신은 마을 곳곳에 남아 있는 관련 건축물과 석조물 등을 통해 650년 전통의 마을 역사와 더불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발췌)

박경용(대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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