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성당을 둘러본 관객들의 감탄사는 전 세계인이 똑같다. ‘와~!’ 딱 이 한 마디가 끝이다. 감탄은 인간 능력에 대한 경외감이면서 동시에 놀라움이다. 그 속에 신의 찬미가 숨어있다. 누군가 곡선은 신의 영역이고 직선은 인간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가우디 성당은 곡선으로 지어지고 있다. 곡선이 감성이라면 직선은 감정이다. 곡선이 여성이라면 감정은 남성이다. 부드러움이 감성이라면 강함은 감정이다. 강함을 품고 사는 감정은 그래서 다툼의 단초가 된다. 세상의 모든 전쟁의 발화점은 감정에서 시작한다.
세계인이 사랑하는 작가인 헤르만 헤세가 말했던 어록이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와 더불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전쟁의 유일한 효용은 사랑은 증오보다, 이해는 분노보다, 평화는 전쟁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뿐이다.’ 감성의 효용 가치를 명확하게 정의 내린 명언 중 명언이다. 그러고 보니 필자의 감성발견도 우연이 아니다. 필자는 그 감성으로 ‘감성교수법’을 개발했다. 그 소스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 교수법 덕분에 KOCW에서 주는 인기 어워드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그리고 작년엔 대한민국 스승상까지 받았다. 감성의 힘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감성을 일깨우는 강의를 개발하게 된 데는 개인적인 슬픈 사연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누구한테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어릴 적 쌍둥이로 태어났다. 얼굴이 달랐으니 이란성 쌍둥이다. 5분 먼저 태어난 이유로 난 형이 되었고 지금까지 영원히 형이다. 동생이 지금까지 잘 자랐더라면 나보다 훨씬 잘생기고 똑똑했을 것이다. 어릴 적 나는 약했고 어눌했다. 그에 비해 동생은 튼튼했고 총명했다. 그런 동생을 삼신할머니가 시기한 것 같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생은 소아마비에 걸렸다. 왼손과 머리 쪽만 빼놓고 모든 기능이 마비되었다. 소위 말하는 ‘식물인간’이 되었다. 소변은 커녕 자기 의지로 돌아눕지도 맘대로 못하는 지독한 고통은 시지프스(Sisyphus)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17살!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동생의 모든 대소변을 다 받아내야만 했다. 그 일은 온전히 내 어머니와 나의 몫이었다. 어릴 때의 기억이 가슴에 훈장처럼 남아있다. 어머니가 아픈 후로 그 일은 자연스럽게 내 담당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기억이 나는 것으로 보아 10년을 꼬박 동생의 대소변을 다 받았던 것 같다. 저주받은 몸을 받았지만 동생은 한 번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장애는 동생이 입었지만 형인 나를 항상 챙겼고 위로했다. 새벽에 소변을 뉘게 하는 내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단 한 번도 잊어버리지 않았던 배려심 많은 아이였다. 어설픈 한 손으로 그림을 그렸고 한글을 썼으며 천자문을 뗐고 띄엄띄엄 영어까지 읽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말이다.
눈빛으로 소통할 수 있음을 난 그때 처음 알았고, 오감으로 체득할 수 있음을 그때 알았다. 긍정의 에너지가 있다는 걸 그때 알았고 이타심의 실천도 그때 배웠다. 어쩌면 내 감성의 발견은 그 무렵부터였는지 모른다. 지금도 가끔 동생을 돌보는 꿈을 꾼다. 41년이 지났지만 어제의 기억처럼 생생하다. 살아보니 그렇더라. 세상에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더라. 그저 덜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안아 주는 것일 뿐….
내가 우리 동생에게 배웠던 감성은 나중에 보니 감사였고 감동이었다. 나에게 감성은 결국 내가 행복해지는 이타심의 작은 시작이었고 발견이었다. 감성의 발견이 곧 행복의 시작이다.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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