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길, 없음
[달구벌아침] 길, 없음
  • 승인 2022.05.0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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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익숙한 일상에 무뎌지는 것을 넘어 하루하루가 새삼스러워질 때, 비로소 오십이 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봄날이 가고 있는 연휴 셋째 날 아침이다. 석가 탄신일이며 시아버님의 기일이다. 또한 월드 스타 강수연이 향년 55세로 별세했다는 비보를 접한 날이기도 하면서 오십 줄에든 내 동생의 생일날이다.

평리동에서 출발해 서대구역사를 거처 와룡산 무학사를 들러 신동재를 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많은 길을 만났다. 단 하루의 짧은 여행이었다. 그 길에서 다양한 삶의 군상들을 엿보고 답습하며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생각들을 비우거나 다시 채우기도 하면서 길에서 길을 물었다.

산책처럼 나선 길에서 처음 만난 길은 얼마 전 새롭게 개통한 ‘서대구역사’였다.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갖가지 플래카드가 벽보처럼 나붙어 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상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세입자의 희생을 애도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새 역사와 상여가 맞물려 있는 풍경이 기찻길처럼 팽팽하다. 새로운 탄생이나 해방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길을 내며 자연의 길을 마련해주듯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는 바람 한 점 풍경 위에 더해본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여럿이 가라’는 평범한 진리 속에서 해답을 찾았으면 좋겠다. 가 본 길이든 가 보지 못한 길이든 결국 길은 길로 이어지듯 서로 맞잡은 길에서 온기를 느끼며 상생하듯 새로운 길을 구했으면 싶다.

알싸한 아침 공기가 품어져 나오는 거리를 활보하며,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신다. 삼 년이 다 되도록 단 한 번도 거리에서 벗은 적 없는 마스크를 오월 둘째 날부터 착용 의무가 풀렸다. 비록 실외에서만 가능한 일이지만. 주변엔 벗은 사람보다 마스크를 쓴 이가 더 많다. 간혹, 낀 사람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눈치가 보인다. 벗은 나로 인해 낀 누군가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아직은.

두 번째 만난 길은 상리동에 자리 잡고 있는 절이다. ‘무학사’라고 새겨진 돌기둥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톨게이트 근처라 그런지 바쁘게 오가는 차량의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 무엇에 홀린 듯 몇 개의 굴다리를 지나 길은 끝인 듯 끝이 아닌 듯 미로처럼 계속 이어져 있다. 되돌아 나오려 했지만, 차를 돌려세울 마땅한 곳이 없다. 인적이 드문 으슥하고 낯선 산길을 따라 쭉 오르니 그 끝에 절이 있었다. 내가 사는 세상과는 영 다른 별천지 같은 세상이 드러났다. 무학사無學寺는 배울 필요가 없는 진리를 표현한 것이라 전해진다. 부처님 오신 날에 맞춰 금낭화처럼 매달아 놓은 연등에 새겨진 소망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논어 중 한 구절을 떠올리며 산에서 내려온다. ‘아침에 진실한 사람으로 해야 할 도리를 듣고 이것을 체득했다면 저녁에 죽어도 후회하지 아니할 것이다.’ 인간 삶의 태도와 살아가는 길을 안다는 것이 이처럼 중대한 것이리라.

세 번째로 이어지는 길에서 길이 막혔다. ‘길 없음’을 만난 것이다. 내비게이션도 모르는 길이라는 듯 시침을 떼고 있던 차였다. 길을 잃을까 봐 누군가 써 놓은 교통 표지판에서 따스함이 배어온다. 혹시나 길을 잘못 들어 사고라도 날까 봐 돌아가라는 온기 가득한 마음을 새겨 놓았다. 다정하게도. 인생길에서는 내일을 미리 알려주는 표지판이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듯 앞만 보고 달려온 길에서 길을 잃었다. 벽을 뚫고 나갈 수도 없고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택해야 하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인 오른쪽으론 갈 수 없다고 하니 선택의 여지라곤 없다. 나갈 길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 끝이 어딘지 모르는 생소한 왼쪽 길뿐이다.

살다 보면 가끔 길을 잃을 때가 없진 않다. 막힌 길 앞에서 망연자실 주저앉아 막막해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좌회전으로 방향을 튼다. ‘경로를 다시 탐색합니다.’ 내비게이션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아비가 말썽꾸러기 자식을 타이르듯 연신 잔소리해댄다. 김규동 시인의 ‘당부’가 불안을 잠재우듯 위로를 보낸다.

“가는 데까지 가거라/ 가다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 쉬다 보면/ 보이리/ 길이”

새로운 길에서 길을 만났다. 신동재를 넘는다. 꽃들의 축제가 한창이다. 아카시아와 이팝나무 꽃, 사이사이 찔레꽃이 길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앉아 사열하듯 피어있다. 결혼식을 올리던 날 첫발을 내딛는 신부의 부케 같은 꽃잎 세례를 우리들 머리 위로 흩뿌려준다. 천사처럼 날개를 펼친 민들레 홀씨가 허공을 향해 날아오른다, 하늘로. 마이웨이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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