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두 개 감각 보다 오감 의존
물성은 실험욕구 자극 메신저
일상 행위 흔적에도 영감 받아
전통-혁신 오가며 감수성 확장
대부분의 결정은 무의식이 하고, 의식이 합리화한다고 믿는 것이 정신분석학에서의 이론이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의식은 인간의 정신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의식 아래 가라앉아 있는 무의식의 영역은 생각보다 거대하다. 작가 이유의 작품은 의식과 무의식의 총합이다. 의식과 무의식을 이분법으로 명확하게 분리하는 것에 반기를 들며, 자신의 내면세계를 의식과 무의식적 행위의 결합을 통해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 질감 중심의 작업 선호
프랑스를 주 무대로 활동하는 작가 이유의 작품이 윤선 갤러리에 걸렸다. 김창영, 우종택, 이기성이 참여하는 윤선갤러리 초대 4인전에 ‘제스트’와 ‘회화에 대한 질문’ 연작을 걸었다.
이유 작가는 지금까지 총 3개의 연작을 발표했다. 모두 질감(마티에르)을 추구하고, 일련의 몸의 움직임을 붓의 결을 통해 담아낸 작품들이다. 그의 첫 번째 연작인 ‘마티에르 풍경’은 화면 전체를 빼곡하게 물감의 질감으로 채운 화풍이다. 캔버스 위에서 물감을 묻힌 빗자루 같은 도구를 통해 의식과 무의식의 흔적들을 표출한다. 이 시기의 특징은 화면을 온전히 정복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한 것이다. “A부터 Z까지 제 자신의 에너지로 흔적을 낸 뒤, 상당한 물감 층의 두께감으로 마티에르를 강화해 그림자까지 생겼었죠.”
두 번째 연작인 ‘제스트’는 ‘마티에르 풍경’ 연작의 변주였다. 첫 번째 연작을 10여년간 운용하며 몸에 과부하가 일어났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몇 백 번의 롤러질로 물감 층을 쌓아가는 반복적인 노동 행위를 통해 화면 전체를 운용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작가는 신체의 한계를 막다른 골목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작업의 새로운 문을 여는 전환점으로 삼았다.
‘제스트’ 연작에서 가장 큰 변화는 여백에 대한 인정이다. “재료를 쓰면서 뜯어진 일부를 가지고 실험한 경험”에 바탕을 두고 두 번째 작업으로 발전시켰는데, 이 연작에서부터 전에 없던 여백이 생겨났다. 작업은 아크릴판에 무의식적인 터치를 가한 후 말려서 떼어냈고, 떼어낸 물질들을 캔버스 위에서 의식적으로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재조합하는 과정에 여백의 역할을 인정했다.
‘제스트’ 연작에서 선(線)적인 요소도 두드러졌다. 선(線)은 대구예술발전소 입주기간 중 서예나, 한국적인 회화감성이 짙은 작가들과 교류한 흔적이다. “‘붓질 모듈’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빈 캔버스’라는 새로운 예술의 장소에서 새로운 이미지로 재조합하는 ‘콜라주 아닌 콜라주’를 실천했어요.”
그의 세 번째 연작 ‘회화에 대한 질문’은 2019년에 대구예술발전소 입주 작가로 활동하면서 탄생했다. 이전 연작들에 비해 물성이 더욱 강해진 작품이다. 물감 덩어리가 더 두터워졌으며, 덩어리는 캔버스 정면보다 모서리로 흘러내린 형상을 취했다. 그가 “과도한 물감덩어리가 캔버스 측면으로 튀어나오도록 낯설게 배치했다”며 “회화의 매체인 캔버스와 물감의 관계를 낯설게 운용하며 최종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작업세계를 설명했다.
여백에 대한 존중은 세 번째 연작 ‘회화에 대한 질문’에서 더욱 짙어진다. 작가에게 여백은 “물성 자체가 가진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에 해당된다. “마티에르의 흐름이나 결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고요가 필요해요. 그런 환경이라야 마티에르에 힘이 생기게 되죠. 저 역시 마티에르에 집중하기 위해 되도록 배경을 고요하게 처리하려 했어요.”
◇ 물성과 행위의 공생 추구
그의 작업에는 늘 물성과 행위가 공생한다. 둘 중 어느 하나가 더 강하거나, 덜 강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둘은 한 몸처럼 연결되어 있다. 이와 같은 물성과 행위중심적인 태도 속에는 현장성에 가치를 두는 작가의 소신이 자리한다. 그는 영상이나 인쇄물처럼 한 두 가지의 감각에 의존하기보다 오감의 활성화를 이끄는 작품들을 선호한다.
그는 “현장에서 작가의 공감각적 행위에 의해 물성이 새로운 형태로 변해갔던 전 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작품이라야만 관객들의 오감을 살아 숨 쉬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회화에 대한 질문’ 연작 역시 대구예술발전소에 입주하면서 대구에서 만난 물성으로부터 시작됐다. 이처럼 그는 어디를 가나 현장이 제공하는 물성에 의식을 열어놓는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실험욕구를 자극하는 매신저”로 물성을 인식한다.
“지난해 노르망디 해변을 걷다가 다양한 색감의 고운 진흙의 뉘앙스에 매료되어 한주머니를 작업실로 가져와 실험을 해보기도 해 보았어요. 저는 늘 새로운 물성을 만나면 주체할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이 피어오르는 것 같아요.”
◇ 물성과 행위가 향하는 질문은 ‘회화란 무엇인가?’
전통 회화는 세계를 담아내는 창으로 사각의 캔버스를 인식한다. 하지만 작가는 세 번째 시리즈인 ‘회화에 대한 질문’에서 “사각의 창에 머물러야할 물감덩어리가 경계를 넘으면서 사각과 물감 자체에서 일어나는 역학관계 자체”를 직시했다. 사각 프레임 너머의 세계도 회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 작가는 “이 시리즈는 캔버스의 나무틀을 떼어내어 기존의 그림 지지대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었던 ”쉬포르 수흐파스“라는 프랑스의 전위적인 운동그룹의 첫 전시 제목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귀띔했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프랑스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했다. 하지만 일러스트레이션을 하면서 오히려 원화의 가치와 매력을 깨닫게 됐다. “평면적인 일러스트레이션에서 물성의 호흡이 느껴지지 않았고 다시 회화로 회귀”했다. 그 시기부터 갈망하던 물성에 대한 욕망을 극대화하기 시작했다.
작가에게는 교육을 통해 습득한 전통적 미학 성향과 그걸 파괴하고 조금씩 가볍게 가려는 두 가지의 태도가 공존한다. 온전히 화면 전체를 채워가며 자신에게 집중하기도 하고, 많은 것을 비워내기도 하는 방식으로 전통과 혁신이 그의 작업 속에서 오고간다.
“저는 실수나 우연이 만든 상황이나 예술적의도가 결여된 일상의 어떤행위가 만들어내는 흔적속에서 현대미술의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다양한 미학적 감수성을 수용하면서 계속해서 작업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죠.” 전시는 30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