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살아야 지방이 산다] 옛 추억이 가득한 공간…재개발로 ‘새로운 시간’ 준비
[마을이 살아야 지방이 산다] 옛 추억이 가득한 공간…재개발로 ‘새로운 시간’ 준비
  • 김종현
  • 승인 2022.05.17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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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억이 담긴 공간, 사라진 고성동 이야기
일제강점기부터 행정구역 개편
고성 1·2·3가동이 ‘고성동’으로
1905년 경부선 대구역 중심 발전
공장·철공소 등 들어서며 인구↑
주변 시장·공장 중심 경제 활동
2022년 현재 도심재생사업 한창
나지막한 담장…좁은 골목길
작은 창문서 들려오던 목소리
철길 옆 공터 평상 위의 추억
사진2-추억의고성시장
쇠락한 고성시장. 시장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됐지만 이곳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억의 한 장소가 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저서 ‘공간의 시학’에서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라고 말했다. 오래 머무르며 지속해서 경험한 공간 속에 시간을 압축해 기억으로 간직하기 때문에 내면적인 삶의 장소들을 분석하는 심리적 연구도 가능하다고 했다. 추억은 잘 공간화돼 있으면 그만큼 더 단단히 뿌리박아, 변함없이 있게 된다는 철학자의 말대로 이제는 재개발로 사라진 대구 북구 고성동을 더 오래 기억하고자 이 글을 쓴다.

◇대구 고성동(古城洞)의 역사

고성동은 원래 대구읍성의 북서 외곽지역인 서상면 후동리에 속한 곳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금정2정목이 됐다가, 해방 이후 1947년 대구부에서 일본식 정(町)과 동(洞) 이름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태평로 3가로 바뀌게 됐다.

1963년 1월에 북구청이 등장하면서 태평로 1가, 2가와 3가 1구는 중구에 속하게 되었고, 태평로 3가 2구, 3구, 4구는 북구에 속하게 됐다. 이후 여러 차례 행정구역이 변했고, 1975년 10월 1일 태평로 4가동을 고성동 1가로, 태평로 5가와 6가동을 고성동 2가와 고성동 3가로 변경하면서 ‘고성동’이란 행정구역명이 등장했으며, 1980년 4월 1일 고성 1가, 2가, 3가동을 ‘고성동’으로 통합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성동은 일제강점기 1905년에 개통된 경부선 대구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일본인들이 진출하면서 대구역 일대에 방직공장과 철공소, 곡물 조합 창고 등이 건립돼 인구가 늘었다. 일제는 고성동을 포함한 금정2정목 일대를 공업지대와 주택지로 주목해서 경마장을 만들고, 1938년 대구방송국(지금의 KT 북대구지사)을 설치하고 인근에 수산물 도매시장을 만들었다.

해방 이후 대구방송국 주변에는 귀국한 동포나 북에서 내려온 전재민(戰災民) 수용소가 만들어졌고, 운동장도 건설되었다. 6·25 전쟁 이후로는 피난민, 도시 저소득층과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사람들이 고성동으로 모여들어 주변에 있던 전매청, 칠성시장, 서문시장, 3공단, 섬유공장 등을 경제활동의 무대로 삼고 삶의 터전을 일궜다.

대구 도심과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고성동은 오랫동안 저밀도 주택과 각종 공장이 밀집한 낙후된 지역이었고 경제활동 배후지가 쇠퇴하면서 점점 인구가 감소하였다. 인접한 침산동, 칠성동이 개발될수록 상대적으로 슬럼화가 심했지만, 2022년 현재 도심재생사업과 재개발이 한창이라 앞으로 고성동은 새로운 시간을 맞이할 예정이다.
 

사진1-기찻길옆오막살이의흔적
대구 북구 고성동 기찻길옆 오막살이의 흔적. 현대 속에 희미한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켜 준다.

◇고성동을 마지막으로 걷던 날의 기억

고성동을 떠난 지 한참이 지났어도 가끔 고성동을 배경으로 하는 꿈을 꿨다. 나지막한 담장과 대문이 이어진 좁은 골목을 맴도는 어린 내가 꿈에 나왔다. 가끔은 육교로 바뀌기 전 전매청 쪽으로 건너가는 차단기가 오르내리던 건널목 앞에 서 있는 꿈도 꿨다. 귀를 막고 혹시라도 몸이 흔들릴까 봐 다리에 힘을 준 채로 경부선 열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구경하던 어린 내가 점점 어른으로 바뀌면서 꿈에서 깼다. 기와나 함석지붕 아래에 있던 작은 창문에서 골목으로 들려오던 누군가의 목소리, 여름이면 경부선 철길 옆 공터에 늘어선 평상마다 걸터앉아 부채질하며 주고받던 어른들의 이야기 소리, 시민운동장 야구장 담장 너머로 온 동네가 떠나가라 외치던 삼성 라이온즈팀 관중의 함성이 생생하게 들리는 꿈도 꿨다.

그래서인지 내가 기억하는 공간이 어떻게 변했을지 늘 궁금했는데 2019년 8월 재개발 직전에 고성동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사람들이 떠난 빈집만 남아 있었지만, 가장 궁금했던 기찻길 옆 골목길 풍경은 그대로였다. 지붕과 담장이 낮은 골목길 사이를 걷노라니 당장이라도 어릴 적 친구가 내 이름을 부르며 어딘가 대문을 열고 나올 듯했다. 그곳에서 동요 가사에 나오는 기찻길 옆 오막살이를 봤다. 덮여있던 기와나 함석은 사라지고 뼈대 아래로 드러난 초가지붕은 근현대 고성동의 시간 화석 같아서 사진으로 남기고 고성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굳이 발품 팔지 않아도 밤이고 낮이고 현관까지 물건이 배달되는 요즘도 시장 구경은 즐거운데 하물며 어렸을 적엔 오죽했으랴. 난전과 가게가 어우러지며 자연스럽게 형성됐던 고성시장을 떠올리면 단골 노점상 사장님, 포장마차에서 시작해 정식 가게로 확장한 맛있는 국물 떡볶이집, 뭔가 과거가 있을 듯한 부리부리한 외모의 사장님이 특제소스에 버무려주던 양념통닭, 참새방앗간처럼 들르던 만화방, 대학생이 되어 난생 첫 파마를 했던 미용실이 생각난다. 마지막으로 둘러보러 갔을 때는 모두 사라지고 떡볶이집만 남아 있었는데, 떡볶이집도 재개발이 시작된 후 고성아파트로 장소를 옮겼다고 한다.

고성동 떡볶이는 만두와 먹거나 팥빙설과 함께 먹어야 제맛이었다. 초록색 플라스틱 그릇에 국물과 함께 담긴 떡볶이를 먹을 때 간장을 찍어 먹기도 했는데 그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거짓말이라고 할 것이다. 입 안이 얼얼하도록 떡볶이를 먹은 후 곱게 간 얼음에 우유 조금과 단팥과 땅콩 가루를 넣은 팥빙설까지 한 그릇 먹고 나면 임금님이 부럽지 않았다. 나중에 직장 때문에 경기도로 올라가서 팥빙설을 왜 팥빙수라고 부르느냐며 목소리 높여 다툰 것도 추억일 뿐이다. 이젠 대구에서도 팥빙설이라고 부르지 않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조만간 고성동 떡볶이를 먹으러 한번 가봐야겠다. 기억하는 그 맛 그대로일지 궁금하다.

◇안녕, 고성동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청년기 기억에는 특별세를 부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때의 기억은 가장 강렬하고 오래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년기에 배운 교훈은 절대로 잊히지 않기 때문에 무엇을 기억할지 선택하는 데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고 선견지명을 발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경제적으로는 힘들었지만, 가족끼리 서로 보듬고, 마음만은 넉넉한 이웃끼리 서로 돕고, 너나없이 어제보다 나은 오늘과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계획하고 준비하며 몸을 아끼지 않는 건강한 습관이야말로 내가 선택했고 기억하는 고성동에서 배운 교훈이다. 쇼펜하우어의 말대로라면 내 기억에는 꽤 고액의 특별세가 부과될 거다. 왜냐하면 내가 살던 물리적 공간인 고성동은 사라졌지만, 지난 시간을 응집한 내면의 공간이자 내 몸이 기억하는 교훈으로써 고성동을 오래도록 추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프리랜서 작가 김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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