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희 개인전 ‘비우다’, “아팠던 기억 비워내니 화면에 그릇이 가득”
조경희 개인전 ‘비우다’, “아팠던 기억 비워내니 화면에 그릇이 가득”
  • 황인옥
  • 승인 2022.05.1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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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9일 봉산문화회관
졸업 후 20년만에 작가의 길로
아이가 빚은 도자기 선에 매료
집적된 그릇, 내면 응어리 분출
캔버스는 상처 치유 ‘힐링공간’
조경희작-비우다-연작
조경희 작 ‘비우다’ 연작

캔버스나 화선지에 그릇을 그리고는 ‘가족’이라고 읽었다. 조경희 작가는 텅 빈 그릇에서 딸의 얼굴을 만나고, 어머니의 미소를 발견한다. 가끔은 삶의 무게에 짓눌린 작가 자신의 꽉 다문 입술을 마주하고 피식 웃기도 한다. 텅 빈 그릇은 그의 가족애가 진하게 담겨지는 따사로운 공간이다.

그가 “그릇에 담고 싶은 것은 가족의 행복이었다”고 밝혔다. “채워지면 비우고, 비우면 채우는 그릇처럼 우리 가족의 행복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며 선순환 되기를 기원했어요.”

봉산문화회관 3전시실에서 열리는 조경희 개인전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비우다’ 연작들이다. 한지에 먹으로 드로잉한 그릇이나 캔버스에 채운 그릇, 그릇을 해체한 선의 유영 등의 다양한 연작들을 소개한다. 전시 제목 또한 ‘비우다’다.

그릇을 처음 그린 것은 2009년이다. 가족 여행으로 떠난 경주에서 도자기 체험을 했는데, 며칠 후 집으로 배달된 도자기에서 그릇의 미학을 발견하곤 작업의 소재로 가져왔다. “아이들이 빚은 도자기가 너무나 사랑스러웠어요. 마치 행복의 아이콘 같았어요.”

가족과 여행을 떠난 그 즈음에 순수회화를 시작할 마음을 내고 있었다. 막상 결정은 내렸지만 “무엇을 그릴 것인지?”에 대한 답은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가족이 빚은 도자기를 받아드는 순간 그는 “바로 이것”이라고 무릎을 쳤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도 20년을 흘려보낸 후에 비로소 작가의 길로 들어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작업보다 사회생활에 열정을 불태웠다. 일반적인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대학 졸업 직후에 직장행을 택했다. 애초에 “효도는 10년만 하자”고 기한을 정해 놓았지만, 막상 10년이 지난 시점에도 일은 끊이지 않았다. 경력이 쌓일수록 일이 스스로 기세를 불리며 굴러가는 형국이었다.

직장생활 10여년 만에 권태기도 찾아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대학원에 진학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공부를 하겠나” 싶어 감행했다. 2년 만에 대학원을 졸업하자 또 다시 일이 그를 찾아왔다. 영진전문대 시각디자인과에서 러브콜을 보내왔고, 이후에도 대구대 디자인대학원 아동미술학과에 초빙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직 생활 역시 10년 이상 이어졌다. 주부와 직장생활을 20여년을 병행하자 이제는 작업을 해도 되겠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때 그릇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첫 작업은 ‘말을 걸다’ 연작이다. 가족 구성원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처럼 화면에 몇 개의 그릇을 구조적으로 배치했다. 흰 그릇으로 작가의 정체성을 녹여내고자 했지만 배경색은 그날그날의 느낌과 감정 상태를 반영하여 현재성도 추가했다. “작가로서 그릇을 통해 세상에 말을 걸고자 한 작품이었어요.”

또 다른 작품인 ‘비우다’ 연작에서는 그릇의 변신이 두드러졌다. 캔버스에서 한지로 확장되고, 집적과 해체가 병행됐다. 먼저 집적부터 시도했다. 푸른 배경 위에 무수히 많은 그릇형상을 집적해 나갔다. 집적된 그릇들은 그의 내면 속 응어리에 대한 분출이었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때로는 힘에 겨웠고, 그 기억들을 비워내고 또 비워냈다.

그는 “삶의 희노애락이 화면에 중첩될수록 내면의 깊이와 사유가 깊어졌다”고 언급했다. “가슴 아팠던 기억이나 상처들을 하나씩 비워내자 그릇이 화면을 가득채웠어요. 캔버스가 상처를 치유하는 힐링공간이 됐죠.”

한지 작업은 코로나 19의 대확산으로 불안해진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처방으로 시작했다. 불안한 세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고요한 마음으로 자신과 또는 세상과 마주하고 싶어 새벽마다 한지를 앞에 놓고 먹으로 일기처럼 그날의 마음상태를 그렸다. “글이 아닌 그릇으로 새벽에 저와 마주했어요.” 한지 작품은 허공에 설치했는다. 작가는 공중에 나부끼는 한지 작품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당당한 자신과 마주한다”고 했다.

다양한 변주를 거듭한 ‘비우다’ 연작에서 주목되는 것은 해체다. 집적에서 해체로의 변화인데, 그릇의 온전한 형상을 버리고 유려한 곡선만 취해 푸른 배경 위에 드로잉 기법으로 표현했다. 2018년 대구미술관에서 진행된 김환기 전시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 그는 그 즈음에 오빠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다.

“김환기 전을 보고 나오는데 바람이 저를 감싸 앉았어요. 그 바람의 속삭임이 마치 먼저 떠난 오빠처럼 느껴졌어요.” 결국 해체된 선은 그날 바람이나 풀, 공기로 작가를 찾아온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의 형상이었다. 전시는 24일부터 29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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