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종점에서, 다시
[달구벌아침] 종점에서, 다시
  • 승인 2022.05.22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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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플라타너스 가지 위, 세 들어 살던 까치집에 느닷없는 재개발 소식이 날아든다. 크레인의 굉음과 함께 집들이 허물어지고 오랜 터전이 싹둑싹둑, 전기 톱날에 무차별하게 잘려 나간다. 허물어진 집 주위를 배회하며 온 힘을 다해 까악, 깍 울어대는 그들의 애타는 울부짖음이 내 가슴 속 깊이 파고들어 와 움을 틔운다. 얼마 전, 아침 댓바람부터 계약서를 방바닥으로 던져 놓으며 방을 빼라던 집주인의 목소리가 탑돌이 하듯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귓전을 맴돈다. 종점이다.
'나무는 뿌리로 돌아간 뒤에야 꽃잎과 가지와 잎이 번성했던 것을 알고, 사람은 관 뚜껑을 덮은 후에야 자녀와 보화가 무익하다는 것을 안다'고 했던가.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것인지 삶의 방향을 묻고 싶은 날, 누구라도 잡고 해답을 구하고 싶을 때면 무작정 찾아가는 곳이 있다. 움켜쥔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서야 가질 수 있는 그곳은 내 마음의 은신처이며 양지바른 집이다.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세종대왕자태실을 찾아 모산1길에 들어선다. 사열 의식이라도 치르듯, 길 양쪽으로 비켜선 비닐하우스들이 은빛 반짝이를 흔들며 길을 내어준다. '선석사 방향 좌회전입니다. 이어서 4시 방향 우회전입니다.' 내비게이션이 삶의 이정표처럼 친절하게 길을 안내 한다. 올려다본 산세가 예사롭지 않다. 생명의 기운이 죄다 봉우리로 몰린 듯 땅의 좋은 기운이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안온하게 감싸준다. 최고의 명당이란 이런 것일까. 생명의 모든 기운을 품은 듯 평온하다.
문화해설사가 우리를 반긴다. 그곳에서 처음 인연을 맺은 그녀가 동행이 되어준다.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기 전, 방문객들에게 꼭 먼저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며 인사를 대신한 멘트를 날린다.
"이곳은 본인이 오고 싶다고 해서 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삼대가 적선해야만 찾게 되는 신비스러운 성역의 공간이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좋은 기운을 받아 가는 곳이랍니다. 조상님들이 음덕을 쌓아야지만 자손 중 누군가가 그 기운에 이끌려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숨차게 계단을 오르는 길, 쉬엄쉬엄 가라며 그녀가 옷섶을 잡는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한 곳이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에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 여겨 출산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다루었다. 민간에서는 땅에 묻거나 출산 후 깨끗해진 마당에서 왕겨에 태를 묻어 태운 뒤, 재를 강물에 띄워 보내는 방법으로 처리했지만, 왕족의 경우는 달랐다.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여겨 태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의 명당을 찾아 안치시켰다는 것이다.
태실지의 형세가 약간 기울어져 있다. 기단이 낮은 남쪽엔 후궁소생의 군이, 직계이며 대군은 북쪽에 두고 기단을 높이는 것으로 적서의 구별을 분명하게 뒀다. 네모난 기단석은 땅을, 연꽃을 새긴 둥근 뚜껑 모양의 돌은 하늘을, 그 사이에 있는 중동석은 인간을 상징한다. 이는 곧 천, 지, 인이 한곳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있는 태실에 비해 기단만 남겨진 채 허물어진 태실을 보며 세조에겐 명당이지만 왕자들 사이엔 피바람이 불었다 하니 과연 길지란 존재하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한 봉우리에 19개의 태를 묻은 공간으로는 세계 최초라 한다.
때론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을 할 때가 있다. 좋은 자리에 묻혀 조상의 음덕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 또한 간혹 있다. 하지만 세월이 가기는 흐르는 물 같고 인생이 늙기는 바람결 같다는 말처럼 권불십년權不十年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다. 꽃피는 아름다운 봄은 아름다우나 하염없이 꽃이 지면 더더욱 인생무상을 느끼는 것 또한 봄날의 비애가 아닐까.
세종대왕의 뜻과 달리 형제들을 죽이고 그들의 태실 또한 파괴하면서까지 왕이 된 세조는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중신들의 간언에 세 번이나 '아버지가 형제간 우애 있으라고 만들어준 자리니 떠날 수 없다. 백성들의 민폐가 염려되어 옮길 수 없다. 왕자 때의 석물을 땅에 묻고 임금이 되었다는 가봉비를 하나 더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고 한다. 대군에서 왕이 된 그의 입장에서는 길지임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숙부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의 태실이 함께 들앉아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긴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단단하고 깊은 뿌리에서 퍼 올린 꽃망울이 곧, 양수처럼 터져 온 세상을 아름다운 화원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탯줄은 끊어도 핏줄은 끊어낼 수 없듯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날 태실을 돌아 나오며 잠시, 태실 수호 사찰인 선석사에 든다. 산란했던 마음이 고요를 찾은 답례로 헌시 한 수 잿밥처럼 지어 올리며 가족들이 기다리는 양지바른 내 집을 향해 힘차게 시동을 건다. 세상 모든 길의 가장자리, 서산으로 지는 해가 붉은 신호등을 켜 든 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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