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 오리 구워먹고 장티푸스 걸리고…웃고 울던 그때 그 시절
[자연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 오리 구워먹고 장티푸스 걸리고…웃고 울던 그때 그 시절
  • 노용호
  • 승인 2022.06.12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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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우포늪 사람들 이야기
사진3

우리나라 농촌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보건 환경이 매우 취약하였다. 장티푸스 등 돌림병이 발병하면 많은 어린이들이 희생되었다. 우포늪은 예나 지금이나 묵묵히 세월의 질곡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다.

 

학교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
가장 중요한 일 ‘소 풀 먹이기’
소벌 가서 개구리 잡고 수영
막대기로 그물 쳐 새들 사냥
그날 동네는 오리고기 잔칫날
흙 발라 구우면 진흙오리구이

◇ 오리 진흙구이 이야기

우포늪 인근에서 자라던 주매마을 아이들의 1970년대 이야기이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 돌아온 오후 3시경에 마을 친구들과 함께 집안의 중요한 재산, 소에게 풀을 먹이러 소벌(우포늪)에 갔다. 소먹이기는 아이들이 집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마을 아이들이 소들을 데리고 우포늪에 갈 때는 주머니에 보리쌀과 소금을 준비했다.

소벌에 도착하여 소들을 풀어 놓으면 소들끼리 모여 풀을 뜯어 먹는다. 장소를 골라 전날 밤에 준비한 30m 길이의 그물을 막대기를 이용해 한 면을 고정시키고 그물 앞에 보리를 뿌려둔다. 다음날 새벽녘 동트기 전에 청둥오리, 말기우(큰기러기) 등은 보리를 먹기 위해 그물 앞에 모여든다. 양쪽에서 그물을 당기고 그물 밑으로 들어온 새들을 몽둥이로 두들겨 잡았다. 한 지게씩 지고 나오면 그날 동네는 오리고기를 먹는 잔칫날이 된다.

여름엔 소벌에 소들이 풀을 먹는 동안 물고기도 개구리도 잡다가 수영도 했다. 소나기가 오고 난 뒤 하늘을 쳐다보면 한 낯 맑은 햇살 속에서 가끔 무지개와 뭉개구름을 보는 행운도 얻게 된다.

어두워질 쯤 집으로 갈 때가 되면 신기하게도 소들이 어린 주인한테 온다. 우포늪의 소먹이기로 또 하루가 간다. 오늘은 소벌에서 재미있게 놀았고 오리 고기도 먹고 기분이 좋다. 집에 가면 어머니가 따뜻한 밥을 하시면서 반기실거라 생각하니 발길이 더욱 가볍고 신이 난다.

겨울 철새가 찾아온 겨울의 어떤 날은 미군들이 4륜차를 타고 먼지 날리며 왔다. 먼지 뒤를 따라 어린이들이 소벌에 간다. 미군들이 사냥총을 쏘면데리고 온 사냥개들이 물어간다. 총에 맞은 새들중에서 개들이 물어가지 않는 새들이 있으면 산에서 보고 있다가 그쪽으로 가서 주워 집에 가져간다.

사냥총에 맞아 떨어지는 새들이 많아 사냥개도 수고스럽게 멀리 산까지 가서 새들을 잡아 오지 않음을 알기에, 어린이들은 산에서 기다리다가 좋아라고 가져가는 것이다. 가져온 새들을 집에서 무를 넣고 오리탕 등을 해 먹었다.

1970년대에 우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노기현씨는 “10월이 되면 뻘에 물이 마른다. 한 10 센치 미터(cm) 파면 미꾸라지가 나왔다” 한다. “재첩은 유어면 대대 도랑에 많았는데, 신고 간 검정고무신 두 개에 소복하게 담아온다. 고무신 두 개면 양이 제법 많다. 집에 가져와 물에 담가 놓으면 밤새 뻘의 흙이 빠져나온다. 이 재첩들을 가지고 재첩국을 끓여 먹었다” 고 한다.

겨울에 잡은 오리에 뻘의 흙을 발라 불에 구우면 진흙 오리구이가 되었다 한다.
 

보건 환경 취약하던 1970년대
장티푸스 걸린 주매마을 주민
후유증에 한 쪽 다리 못쓰기도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가 졸업만
재활 후 목발로 힘든 통학길 다녀
불굴 의지로 교육자로 정년퇴직

◇ 장티푸스 이야기

우리나라 농촌에는 1970년대 까지만 해도 보건 환경이 매우 취약하였다. 주매마을에 살던 노점용씨는 1948년생인데, 초등학교 6학년 여름에 서부 경남에 발생한 돌림병 장티푸스가 마산에서 대구로 가는 국도변을 따라 창궐했으며 많은 어린이들이 희생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점용 어린이도 여름방학때 돌림병에 걸렸으며 고열로 인한 의식이 왔다갔다하는 시간들이 여러 번 있었다고 부모님으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창녕군에서 가장 큰 병원인 왕산병원에 2~3주 정도 입원한 것같고 왕산병원에 입원했던 어린이들 중 몇 명은 죽어 나갔으며, 점용 어린이도 기억으로는 처음에는 병원 본체건물의 입원실에 있었는데 어느날 병의 예후가 워낙 좋지 않아 병원의 입구에 있는 스레트 건물로 쫓겨나게 되었는데, 의사선생님께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집으로 데리고 가라고 아버님께 귀뜸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이 어찌 자식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의사선생님께 간곡히 부탁을 드려 문간방 한쪽 귀퉁이에 며칠만 더 있어보기로 허락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안타까움 속에 이틀째 되는 날 아침 햇살이 문틈으로 들어오는데 아버지가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니 약간의 혈색이 감도는 게 아닌가 싶더란다. 급히 달려가 의사에게 말하니 의사가 와서 진단을 하더니 “그래요. 애가 살아났네요” 하더란다. 그리하여 점용씨는 다시 사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병의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사용할 수 없게 되어 6학년 2학기는 학교를 가지 못하였고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인편으로 전달받은 졸업장과 상장은 어딜 갔는지 간곳없고 부상으로 받은 옥편은 지금까지 인생의 삶에 동반자로 남아있다고 한다.

걸음을 걸을 수가 없으니 중학교는 포기하고 열심히 재활에 힘쓰고 있었는데 5월말쯤 되어서야 어느 정도 걸을 수가 있게 되어, 또래들이 중학교에 진학하여 다니는 것을 보고 학교에 가겠다고 부모님께 졸라대니 아버님이 주매마을에서 다니는 같은 면 대성중학교에 가서 사정을 해보니, 이미 입학하여 3개월이 지났으니 지금 학교에 와도 수학하기에 무리가 있고, 다리가 불편하여 어떻게 30리 길을 걸어다닐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올해는 건강을 회복하고 다음 해에 입학하도록 권고하니 어쩔 수가 없지 않느냐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죽을 뻔했던 아들이 답답해하고 학교가기를 소원하니 아버님께서 이방면에 있는 옥야중학교에 가셔서 종씨이기도 한 노규석 교장선생님께 간곡히 부탁하니 그러면 청강생으로 한번 다녀보게 하자고 허락하여 6월초에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쪽 다리가 힘이 없어 걸어 다니는데 어려움이 많있다. 목발을 짚고 쩔룩거리면서 30리 길을 걸어 다닌다는 게 정말 힘이 들었다. 말로만 회고하기엔 표현에 부족함이 많은 것 같다고 한다.

지금은 ‘잠자리나라’라고 부리는 곳을 방골이라 불렀는데, 그 넘어 소나무 많던 장군 무덤 근처에 늑대들이 자주 출몰하고 근처 마을에 있는 송아지를 몰아가서 양지바른 장군무덤 근처에서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도 있고 해서 방골 골짜기가 정말 무서운 곳이었다고 한다. 마을은 보이지 않고 한적한 골짜기로 국도에는 하루에 자동차가 몇 대 정도 지나가는 고요한 곳이었다.

책가방을 들 힘이 없어 책 보따리를 등에 메고 주매마을 안땀에서 산길을 넘어 방골골짜기의 국도를 따라 우만마을로 가는 길은 험하고도 먼 길이였다. 언제나 등교길에는 어머니께서 동행하여 방골의 국도 만나는 지점의 산 높은 곳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나는 목발을 짚고 땀을 흘리며 국도를 굽이돌아 엄마가 보이는 도로까지 가게 되면 서로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우만마을 쪽으로 황급히 걸어가는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학교는 포기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청강생으로 허락을 받았으나 결국 꾸준히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더니 2학기가 시작되고 가을이 오니 해가 짧아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올때면 해가 서산에 걸리기 일쑤였다. 혼자서 방골골짜기를 넘어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였다. 일단 장재마을의 친구들과 장재마을에 도착하면 큰어머니 집에 들러서 큰어머니께서 소목마을로 가는 길까지 전송을 해주었다. 그런 다음에 소목마을 친구와 친구 누나가 주매마을이 보이는 곳까지 데려다주는 그런 날들이 꽤나 있었다. 그때는 정말 인심이 좋았다. 오늘날은 불가능한 일도 모두가 자기 일처럼 도와주는 그런 따뜻한 정을 나누는 세상이었다.

불굴의 의지로 학업에 정진했던 점용 학생은 장성하여 국가 연구소를 거쳐 대학에서 교육자로서 정년퇴직을 하였다. 지금은 인생 2막을 본인이 개발한 ‘마음을 다스려 통증을 치료하는 건강 프로그램으로 사회봉사 활동을 하며 살고 있다.

 

노용호<우포생태관광연구소장·경영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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