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가유문화와 달구벌]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제사 지내니 해와 달이 살아나
[신가유문화와 달구벌]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제사 지내니 해와 달이 살아나
  • 김종현
  • 승인 2022.06.2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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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비단 짜던 신라아가씨, 일본의 천조대신으로
신라어 ‘모라’는 모여 사는 마을 의미
제주도, 탐나는 마을이라 ‘탐모라’
일본에선 마을을 ‘무라’라로 사용
전략촌·요새마을 의미 ‘비리’‘부리’
태국 마을 10여 곳서 지명으로 남아
포항 오천읍 ‘노인들이 부지런한 나라’
세오 ‘세발 까마귀·가는올 명주’ 의미
남보다 더 많은 노력 하라는 선인 교훈
오늘날 빨리빨리 민족성의 기원이 돼
신가유삼족오
‘세오(細烏)’라는 신라어엔 세발 까마귀(三足烏) 혹은 가는올 명주(細纖紬)라는 의미가 있다. 그림 이대영

◇지구촌 인류가 자신도 모르게 사용하고 있는 신라어

오늘날 경상도(대구) 사투리에서 “한테 모라!(한 곳으로 모여라)”라는 말을 아직도 한다. 중국 신당서(新唐書) 기록에 의하면, 신라어 ‘모라(牟羅, mora)’는 ‘(모여 사는)마을’을 의미했다. ‘큰 마을’은 신라어론 ‘건모라(健牟羅, geonmora)’이고, ‘수복촌(收復村, 빼앗은 마을)’은 ‘침모라(侵牟羅, chimmpra)’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다. 오늘날 제주도는 고구려 땅이기에 탐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탐모라(耽牟羅, tammora)’라고 했다가 일본서기 등에서는 줄여서 ‘탐라(耽羅)’라고 했다. 울진봉평 신라비(524년)에서는 신라중고기(中古期)의 월경인촌(越境人村)이란 의미로 ‘거벌모라(居伐牟羅)’ 기록과 광개토왕비에선 옛 마을의 성이라는 뜻인 ‘고모루성(古牟婁城)’ 백제성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신라어 마을 모라를 고구려어로는 ‘모루(牟婁)’라고 했다. 오늘날 일본에선 마을(村)을 ‘무라(むら, mura)’로 사용하고 있다. 마한(馬韓)이나 백제에서는 ‘모로(牟盧, moro)’ 혹은 ‘모라(牟良, mora)’로 기록했다.

이렇게 전략촌 혹은 요새마을이란 의미로 삼한시대에 ‘비리(卑離, biri)’라고도 했다가 백제시대엔 ‘부리(夫里, buri)’라고도 했다. 대표적으로 548년 백제성왕(聖王, 523~554) 때 부여소부리(夫餘所夫里)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선 고소부리(古所夫里),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 소부리(所夫里) 등의 지명이 나오고 있다. 현재도 남아있는 우리나라 지명으로는 제주도 산굼부리(山穴凹, 山仇音夫里)등이 있으나, 이상하게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태국(Thailand)이다. 롭부리(Lopburi), 칸차나부리(Kanchanaburi), 랏차부리(Ratchaburi), 싱부리(Sing Buri) 등 십여 곳에 지명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용어가 같은 건 범어(梵語, Sanskrit)인 ‘부리(Puri)’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요새화된 도시(fortified city) 혹은 요충지(key point region)라는 뜻이다.

◇신라어 ‘미르(water)’가 러시아에서도

만약 현재시점에서 신라고어(新羅古語)를 연구하자면, 국내에서는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의 방언에서도 찾을 수 있으나, 이상하게도 외국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당시 신라의 국제교역의 힘이었다. 오늘날 일본어의 7할은 백제어가 기반이고, 신라어에서 나온 말도 15~ 20%는 된다. 뿐만 아니라 중국기록으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신라조, 신·구당서 동이전 신라조, 양서 신라전 등에서도 많이 남아(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양서신라전의 사례를 살펴보면 : “그곳(신라) 말로 큰 마을(大城)은 ‘건모라(健牟羅)’라고 하고, 읍(邑)의 안쪽은 ‘탁평(啄評)’, 바깥쪽은 ‘읍륵(邑勒)’이라고 했다. 갓(冠)은 ‘유자례(遺子禮)’, 내의는‘위해(尉解)’, 바지[袴]는‘가반(柯半)’, 신발[靴]은‘세(洗)’라 했다.” “그들(신라 사람들)은 절하고 걷는 걸음모습이 마치 고구려 사람들과 아주 닮아 있다. 그런데 같이 쓰는 글자가 없어서 나뭇가지에다가 칼로 부호 같은 걸 새긴 부호(木刻信)로 서로 의사소통을 하거나 약속도 한다. (양나라에서) 신라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때는 중간에 백제 사람을 끼어 넣어서(중간통역으로) 소통했다.”

최근 국내외 목간(木簡)에서 나온 신라의 수사를 살펴보면,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 목간에 “하나(一邑), 둘(二尸), 셋(三邑)...”등으로 표기돼 있다. 고려어의 기반이 신라어였기에, 고려어를 이어받은 조선어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신라어가 기반이다. 신라향가처럼 고려향가도 전해오기에 고려어를 통해서 신라어까지 ‘거꾸로 거슬러 추론(逆行推論, retro-duction)’해 올라감도 가능하다. 한양대학교 수학교수를 역임했던 김용운(金容雲, 1927~ 2020)은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 : 한국어와 일본어는 같은 뿌리라.”라는 저서까지 출간했다.

‘신라’라는 국명은 서라벌의 새로운 명주비단 조하주(徐羅伐之新朝霞綢)인데 이를 줄여서 외국에서 신라라고 했으며, 일본에서는 신라기(しらぎ)라고 했으며, 남중국해 주변국에서 ‘실크(silk)’라고 했다. 서세동점의 영향으로 영어단어에도 사용되었다.

물 섶에 모여 사는 ‘동네(mir)’ 혹은 ‘집단(mir)’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본에서 ‘미즈(みず)’로, 영어사전에는 신라어 ‘물거울(mirror)’, ‘수렁(mire)’, ‘(물거울처럼) 헛것에 비춰짐(mirage)’ 혹은 ‘(물에 비치는 것처럼) 현실에 나타남(miracle)’이 오늘날 영어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우리말에 ‘미르’는 조선시대 최세진(崔世珍,1468~1542)이 1527년에 쓴 ‘훈몽자회’에서 “미르 룡(龍)”이라고 해석을 단 이후에 물(水)에서 용(龍)으로 의미변천(意味變遷, meaning transition)을 했다. 오늘날 미르(물)의 의미로 남아있는 단어론 “미~”라는 접두사가 붙어있는 미나리, 미리내(銀河水), 미꾸라지, 미더덕, 미루나무(水邊綠地), 미터(高水敷地) 등이 국어에 남아있다. 2016년에 인구회자(人口膾炙)했던 ‘미르재단’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세오녀, 연오랑에 이어 일본왕이 되다

명주 짜던 신라아가씨 세오녀(細烏女)가 일본천조대신(日本天照大神)이 되었다. 오늘날 포항시 오천읍(烏川邑)은 별나라(辰國, 혹은 三韓時代)대 때 별 동네(辰韓) 12 나라 가운데 ‘노인들이 부지런한 나라’라는 의미의 ‘근기국(勤耆國)’이었다. 한반도에서 동해에 떠오르는 해돋이 명소라는 뜻에서 태양숭배의 ‘삼족오(三足烏)’신앙에 결부시켜 ‘큰 까마귀 고울(斤烏之縣)’이라는 의미에서 신라초기 삼국정립 때는 근오지현(斤烏支縣) 일명 오량우(烏良友) 혹은 오천(烏川)이라고 했다. 통일신라 757(경덕왕16)년에 임정현(臨汀縣) ▶의창군(義昌郡) ▶흥해군(興海郡)으로 배속되었다. 고려에 들어와 930(태조13)년에 ‘동해의 해맞이’라는 의미를 살려 영일현(迎日縣) 또는 연일현(延日縣)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해맞이(迎日)와 세발 까마귀(三族烏)를 소재로 한 ‘해살(三族烏)처럼 밝은 미녀(細烏女)’라는 설화를 낳았다. ‘세오(細烏)’라는 신라어엔 세발 까마귀(三足烏) 혹은 가는올 명주(細纖紬)라는 의미를 음과 훈으로 표기했다. 여기서 세발(三足)은 어떤 상징성을 나타내기보다 한발 더 빠름(快了一步, one step faster), 보다 발 빠름(快脚, quick feet) 혹은 남보다 더 많은 노력 혹은 행동을 하라(Make more effort or action than others)는 선인의 교훈이다. 오늘날 나타난 결과는 빨리빨리 민족성의 기원이 됐다.

이와 같은 설화를 바탕으로 고려 때 경산시에 출생한 일연(一然, 1206~1289)은 1281년에 출간한 ‘삼국유사’에서 “157(阿達羅尼師今4)년에 동해바닷가 연일현(延日縣)에 ‘해돋이를 보고 성장한 사나이(延烏郞)’가 ‘섬세한 실오리로 명주를 짜는 미녀(細烏女)’와 행복하게 살았다. 어느 날 하루는 연오랑 사내가 해초를 채취하러 바다에 나갔다가 갑자기 바위 같은 물체(혹은 물고기)가 그를 등에 업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는 일본왕 즉 천조대신(天照大神)이 되었다. 세오녀는 남편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남편이 벗어놓고 간 신발을 보고 그 바위에 올라갔더니 세오녀를 싣고 일본에 도달했는데 나중에 남편이 죽은 뒤 왕비가 되게된다. 세오녀까지 일본에 가자 신라에는 해와 달이 없어졌으니 신라국왕은 일관에게 물어, 일본에 사자를 보냈다. 연오랑이 ‘내가 일본에 온 건 하늘이 시킨 일이니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아내(細烏女)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갖고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해결 될 것이오.’라고 했다. 그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달이 다시 살아났고, 그 비단을 귀비고(貴妃庫)에 보관했으며, 천제를 지냈던 곳을 도기야(都祈野, 해돋이 들)라고 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글·그림=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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