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준의 세상이야기] 세계제국으로의 기행 Ⅲ : 프랑스에서 대영제국까지
[김호준의 세상이야기] 세계제국으로의 기행 Ⅲ : 프랑스에서 대영제국까지
  • 승인 2022.06.2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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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준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조지워싱턴대 국제정치학 박사
국제정치학의 기원은 약 200여 년 전 하나의 혁명과 하나의 책의 주석(footnote)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의 혁명이란 1789년 주권이 국가 내에 본질적으로 내재한다고 명문화한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을 의미한다. 하나의 책이란 1789년 제레미 벤담의 ‘법과 도덕의 원칙’이라는 책으로 그 주석에서 국제(International)의 의미로 Law among nations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1804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관을 쓴 천재적 군사전략가 나폴레옹은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굴복시키고 개선문을 만들었다. 파리를 재건축하여 세계 정치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는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러시아를 차지할 줄 알았으나 러시아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100만 군대를 잃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1814년 엘바섬으로 유배를 떠나고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도 패하면서 프랑스 제국은 몰락했다.

Pax Britannica(영국에 의한 세계지배). 영국은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으며, 전성기 식민지는 45개국, 세계 영토의 1/4, 세계 인구의 1/6을 차지했다. 세계의 어젠다와 규칙을 만들고 기축통화 역시 파운드였다. 세계 영토의 0.2%, 인구 1,000만 명의 작은 섬나라가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첫째, 산업혁명 때문이다. 런던의 인구 증가로 나무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삼림이 황폐해졌고 그로 인해 목재의 3배의 에너지를 가진 석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712년 토머스 뉴커먼은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깊은 땅 속의 석탄 채굴에 필수적인 물을 제거하는데 증기를 이용한 펌프를 사용했다. 이후 증기선, 증기기차, 증기자동차가 나왔다. 1733년 존 케이는 방직기인 플라잉셔틀을 만들어 면직물 직조 속도가 4배 빨라졌고, 한 번에 8가닥의 실을 뽑는 제니방적기는 방적 속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제2차 산업혁명은 전기와 대량생산의 결과물이었다. 전기는 인류에게 어둠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었고 밤 생활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대량생산은 인류가 수만 년 동안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의 승리로, 과거에는 물건을 만들려면 물건으로 사람이 다가갔지만 대량생산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물건을 사람 앞으로 당겨놓았다.

둘째, 영국의 해군력 때문이다. 마한(Mahan)은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며 영국 해군력의 성장과 영국의 세계 지배가 궤를 같이했다고 주장했다. 영국 해군은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1805년 넬슨 제독에 의해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 22대를 패퇴시켰으며, 세계 주요 해협 즉 희망봉, 수에즈운하, 호르무즈 해협, 말라카 해협 등을 장악해 해상통로 확보와 전략적 요충지를 통제함으로써 세계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셋째, 영국의 세계지배를 위한 보석이 된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도는 기원전 3,000년 전부터 목화를 재배했으며 기온과 습도가 높아 면직물이 발달했다. 인도의 면직물에 유럽은 열광했으며 귀족이나 부유층들은 코튼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1757년 3천명의 영국군이 5만 명의 프랑스군을 플라시 전투에서 물리침으로써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후 인도의 면은 모두 영국으로 가져가 가공하여 전 세계로 수출하게 되었다. 인도 내에서 면직물 옷 생산을 막기 위해서 영국은 인도에 있는 면 기술자 수만 명의 손가락을 잘랐다고 한다. 과거 제국주의자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국은 인도의 면 자원을 이용해 부를 축적했고 인도 청년을 군인으로 차출해서 영국군으로 사용해서 세계를 지배했다.

넷째, 정치적 자유와 안정이 확보되고 사유재산이 영국에서 처음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자유시장과 자본주의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 영국이다. 1688~1689년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나 의회와 국민은 왕권에서 벗어났다. 영국 국왕은 의회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법을 제정하거나 세금을 징수할 수 없게 되었다. 영국은 시민들의 경제생활에 사유재산을 허용했다. 옛날에는 평생 연구한 기술과 상품을 왕에게 바치는 것으로 끝이었으나, 명예혁명 이후 개인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고 마음껏 부를 창출하게 되었다.

다섯째, 설탕사업으로 쌓은 부의 축적 때문이다. 콜럼버스가 사탕수수 씨앗을 중미로 가져가면서 사탕수수의 대량 재배가 시작되었다. 사탕수수 농사는 노동집약적 산업인데, 당시 1억 명이던 중남미 인구가 천연두와 스페인군의 야만적 학살로 1천만 정도만 남게 되자 아프리카에서 무자비한 인간사냥이 시작되었다. 전 세계가 설탕의 단맛에 빠졌고 설탕 재배의 이윤이 막대할 것으로 예상되자 영국은 대규모 노예무역에 뛰어들었다. 영국은 설탕 무역과 노예무역으로 번 돈으로 산업 혁명과 해군력 증강을 도모할 수 있었다. 지금도 설탕으로 만든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당시 사탕수수 재배 소유주나 설탕 무역업자는 국왕인 조지3세보다 더 좋은 마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영국에서 새로운 자본가 계급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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