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를 다 먹고 나면 그해 여름이 지나갔다
“그림자가 길어질 것 같다”라는 발신 주소로
감자가 배송되어 온 지가 벌써 20년 째다
송신이 두절 되면 까닭 없이 앓게 된다며
흙 묻은 큰 감자 몇 개 소쿠리에 담고 보니
늘 순결한 마음이 세월로 녹아져
봉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분 좋은 예감은 나만의 것이다
단단함으로 버티는 둥근 힘을 익히면
버텨도 안 되는 걸 알아 순하게 누그러진다
하얀분 뭉개뭉개 핀 감자상 앞에
파충류 표피가 된
늙은 시아버지 목주름을
감자 껍질을 벗겨내듯 걷어 낸다
비어있는 내 영혼의 곳간에
아직도 말수가 적은 옛친구 내 곁에 그대로 있어
살포시 눈 감으면 나무복도 뛰다니던
그 소년이 내 수명을 붙잡고 있다
◇이필호= 1959년 경북 군위 출생. 2010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삶과 문학 회원, 대구 작가회의 회원, 2017년 시집 <눈 속의 어린 눈>.
<해설> 어릴적 친구가 농사를 지어 지금까지 감자를 보내주는 것에 대한 감사의 답시를 쓴 것 같다.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같이 농사를 지어 무엇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에 맞서서 시인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시를 지어서 읊어 주는 것이다. 말수 적은 친구의 대답은 또 말없이 감자 한 상자를 보내는 일일 것이다. 잔잔한 우정을 지켜보는 순간이다.
-정소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