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살아야 지방이 산다] 고단한 삶 속에 간직한 기억…마음의 보물 항아리
[마을이 살아야 지방이 산다] 고단한 삶 속에 간직한 기억…마음의 보물 항아리
  • 김종현
  • 승인 2022.07.19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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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구 대현동 어르신들과 추억을 기록하다
좁은 골목 다닥다닥 붙은 작은집 옥상
홀몸노인 주민 삶 적나라하게 드러나
다양한 경험 바탕 자신만의 이야기 간직
한국전쟁 때 피난민 모여 판자촌 형성
칠성시장과 함께 삶 터전 일구며 살아
일상을 역사로 재탄생 ‘아카이빙’ 작업
좁은집 방 하나 부엌 하나에 한 식구가
아파트 들어선 자리엔 원래 간호학교
신천교 쪽 강변에는 큰 직물공장이…
대구간호학교-대구과학대학50년사
대구간호학교 정문 (대구과학대학 50년사에서 인용).

◇대구 동구 신암동으로 분류되었던 대현동

2020년 지역특성화 사업을 통해 대현동 어르신들과 함께 사진으로 마을을 기록하고, 어르신들의 이야기로써 기억 속 대현동을 기록할 기회가 있었다. 일터가 대현동인 나는 사무실을 오고 가며 만나는 풍경이 있다. 좁은 골목 다닥다닥 붙은 10평에서 20평 남짓 되는 집들에 대문 위 옥상에는 TV안테나가 서 있고, 조그만 공간이라도 있으면 텃밭을 가꾸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대부분 홀몸노인인 대현동 주민의 삶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풍경이다. 지역 차원에서는 재개발을 위한 노력을 많이 하지만 정작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오신 어르신들은 재개발이 반갑지만은 않은 일이다. 평생을 살아온 마을을 떠나 적은 보상금으로 어디에 거처를 구해야 할지 걱정이 앞서는 분들이다. 청춘을 다 바쳐 나라와 가족의 발전을 위해 살아왔지만, 한순간 사회의 소수자로 전락하여 사회와 단절된 환경에서 고립된 채로 하루하루를 살고 계신다.

하지만 모든 어르신들은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 즉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어르신들의 모든 경험은 여느 젊은 세대보다도 소재와 주제가 다양하며 그 자체로 타인에게 훌륭한 삶의 교재가 된다. 주거환경이 열악하고 노년층이 많은 ‘대현동’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어르신들의 역사만으로 보자면 그야말로 근대 대구역사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겠다.

대구 동구 신암동으로 분류되었던 대현동은 1975년 북구로 편입되면서 ‘대현’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대구의 국립대학교인 경북대학교의 양현을 기원하는 뜻에서 대현(大現)으로 하였으며 ‘크게 배우는 자가 많으면 현인이 많은 것(大學者多則賢人多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대현동은 현재 칠성교에서 경대교를 아우르는 신천동로에서 경북대학교 절반가량까지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특히 대구공고 사거리에서 경대교 사거리의 동대구시장 쪽의 내부구역은 대현LH3단지, 대현뜨란채, 대현e편한세상아파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단층이거나 2층 정도의 다세대주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파트 재개발에서 제외된 주택들이 예전의 모습을 유지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대현동사무소1971
대현동사무소-1971년 신암6구 동사무소. 대현동 주민 정제곤씨 제공

이러한 대현동은 6·25 한국전쟁 시절 피난민들이 모이며 시작된 판자촌으로서의 역사와, 이후 칠성시장과 더불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온 분들의 소소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개인의 단순한 일상으로만 여기고 만다면, 추억으로 스러져 세월에 묻혀버릴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일상을 역사로 재탄생시키는 아카이빙 작업을 통해 지역과 그곳에서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스토리텔링함으로써 대현동만의 고유한 지역문화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사무실 가까운 거리에 미용실이 있다. 마을의 미용실은 어르신들의 일상 속 놀이터이자 마을의 이야기가 유통되는 곳이기도 하다. 미용실에서 만난 어르신들께 조금만 이야기의 문을 두드리면, 금세 자신의 기억 속 추억의 장을 열어 주신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40년, 5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 기회삼아 ‘어르신과 함께하는 우리동네 역사만들기’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사진도 촬영하고 대현동의 역사도 공부하는 가운데 그분들의 삶의 이야기를 채집하게 되었다.

어느정도 친밀함이 쌓이자 어르신들은 고단한 삶 속에 간직하고 있던 동네의 기억을 이야기했다.

“집들이 낮아서 기어나가고 기어 들어가고 그랬지, 골목이 좁아서 비슷비슷해, 그래서 집에 가는데 길을 못 찾아서 애먹었다니까. 집도 좁아서 신발을 문밖에 벗어 놓기도 하고, 방 하나 부엌 하나 그래 살았지 뭐. 그때도 피난민촌이 많이 있었다. 전부 연탄때고 살았지. 새끼로 한 장씩 묶어 가꼬 팔기도 했는데… 화장실은 공동화장실이 있었는데. 많이 불편했지 어떤 집은 부엌이 뒤에 있었고, 그 옆에 화장실이 있었어. 거기 살 때 울기도 많이 울었어.

신도극장 입구에 사진관이 있었어. 도장파고 하는 그 집인데, 신도극장 구경 많이 갔다. 쑈도 보고. 신도극장이 잘 안되면서 안에 제과점도 생겼고. 소리사도 있었고, 극장 그만두고 카바레도 했다 아이가. 저기 높은데 아파트 들어선 데 간호학교가 있었어 그때 자취생들이 많았지. 이발소, 미장원도 많았다. 협동이발소가 높은데 있었는데, 뜰안채아파트 생기면서 옮겨 갔다.”
 

수업장면사진
대현동 ‘어르신과 함께하는 우리동네 역사만들기’ 수업 사진.

그리고 조사과정에서 일제강점기 달성군 수성면 신암동이었던 곳에 터를 잡고 살았던 분의 후손으로서 대현동에 거주하는 정제곤씨의 이야기도 수집할 수 있었다.

“조부님이 1930년경에 달성군 공산면 덕곡동에서 이곳으로 나와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지요. 그때는 달성군 수성면 신암동이었다 하던데요. 서류에 보니 신암동 845번지로 되어 있어요. 지금 경북대 지도연못 부근 공대 6호관쪽에 마을이 있었어요. 한 60에서 70호 정도 되었고. 마을이 아랫동네 웃동네 그렇게 나누어져 있었어요. 그때 부근에 못이 세 개있었는데, 쌍둥이못하고 일청담하고..일청담은 땅콩처럼 생긴 못인데...

신천교 쪽 강변 쪽에 직물공장이 큰 게 있었어요. 지금 돼지갈비집이 있는 자리이지 싶은데, 회춘산부인과가 신도극장 건너편에, 수명당 약국도 있었고, 예전 해바리기 주유소 옆이 아버지가 동장으로 근무했던 신암6구 동사무소였어요.”

대현동은 경북대학교의 역사와 함께 발전하고 성장해 왔다. 더불어 사라진 신도극장은 근대 대현동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경북대학교가 확장하면서 강제 수용된 주변 주민들의 아픈 상처 또한 지금은 추억으로 승화되어 대현동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으며, 신도극장 또한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추억을 남겨두고 이젠 복합병원으로 재탄생하여 주민들의 버팀목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요구되는 지역사회의 문화형성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애환과 즐거움이 담긴 마음의 보물 항아리라 할 수 있겠다.

김숭열/사진작가·대구사진영상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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