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칼럼] 생의 마지막 목표로서의 품위있는 죽음
[의료칼럼] 생의 마지막 목표로서의 품위있는 죽음
  • 승인 2022.07.31 21: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경록 안심가톨릭 연합의원장 대구시 의사회 편집위원
이른 무더위에 모처럼 내리는 반가운 장맛비에도 하필 비 오는 날 요양원에 방문 진료를 나가야 하는 상황이 마뜩치 않았다. 한 분, 두 분,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청진을 하고 돌아서 나오다 보니 문득 비어있는 침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친 간호사는 늘 그래왔다는 듯 지난주에 돌아가셨다고 조용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알려주었다. 그제서야 2주 전 진료 중에 반갑게 건네던 인사에도 힘겹게 실눈을 뜨며 나를 쳐다만 보던 한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7~8년 전 촉탁 진료를 처음 나갔을 때도 이미 치매를 심하게 앓고 계시던 터라 나를 가족과 혼동하시며 환한 웃음으로 맞아 주시던, 그나마 몇 년 전부터는 침대에 누워 그저 눈만 깜박이며 가느다란 생체 신호만 보내오시던 분이었다. 이미 아흔이 넘은 나이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정신마저 온전치 못해 그저 먹여주는 대로 입혀주는 대로 힘겹게 생명선을 이어오시다 돌아가신 그분은 과연 자신의 마지막 생을 어떤 식으로 마감하길 원하셨을까.

얼마 전 국회에서 약칭 조력 존엄사법이 발의되었다. 조력 존엄사란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가 원하면 의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의사조력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이라고도 불린다. 소생 가능성이 없는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존엄사만 허용하는 기존 연명의료법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환자의 주도적 자기 결정권을 존중해 생명을 앞당기는 행위로 세계적으로는 2002년 네덜란드가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이래 유럽 및 북미 국가들을 중심으로 점차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최근 한 여론 조사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약 82%가 조력 존엄사법의 입법에 찬성한다고 한다. 그만큼 인생의 마지막을 스스로 품위 있게 마감하고자 하는 데에 많은 국민들이 공감한다는 뜻일 것이다. 또한 법안을 촉구하는 한 노인단체는 집회에서 "국민의 자유는 죽음의 영역에서조차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의료계는 매년 30만명 가까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여전히 OECD 국가 중 자살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가진 우리나라에 자칫 생명 경시의 잘못된 풍조를 심어 줄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무엇보다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라는 용어 자체가 가지는 사회적, 의학적 모호성과 제도적, 사회적 합의 부족 등의 이유를 들어 법안에 반대하고 있다. 자살 방조라는 법적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환자를 둘러싼 가족간의 문제, 종교적, 윤리적 문제도 법안이 넘어야 할 어려운 난제들 중 하나일 것이다. 또한 의사들은 인간이 태어날 때 생명의 권한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듯이 그 생명을 끝낼 수 있는 권리도 스스로에게는 없다고 한다. 한 인간의 죽음은 남은 가족과 이웃, 사회와의 합의를 통해 자연적으로 이루어져야 비로소 존엄하고 품위로울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존엄하고 품위있는 죽음을 논하기에 앞서 질 높은 생애 말기의 돌봄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국가적 지원과 호스피스·완화의료의 확대로 환자의 경제적 부담과 육체적 통증 줄여 줄 수 있고 심리적 돌봄을 통해 조력 존엄사법의 필요성을 대체할 수도 있다. 미국, 영국, 대만, 일본 등 많은 국가에서 이미 호스피스 기금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고, 영국은 '삶의 마지막 돌봄'을 국가전략으로 추진해왔으며, 미국은 오래전부터 매년 11월을 '국가 호스피스 달'로 선포하고 있다. 또 캐나다는 국회가 모든 캐나다인의 권리로 '삶의 마지막 돌봄' 정책을 주도하고 있다.

누구도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이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진료를 보면 노인 환자들의 "아프지 않고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푸념같은 넋두리를 자주 듣곤 한다. 평균 수명이 80세를 훌쩍 넘긴 지금, 어느 순간 무조건 오래사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아프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한 노후의 과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더이상 터부시 되어야 할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훌륭히 완성되어야 할 생의 마지막 목표 자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품위 있는 죽음을 선택할 자유와 생명 존중의 윤리 사이에서의 갈등은 어느 한쪽이 옳고 그름의 명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다함께 고민해야할 과제이어야 한다.
여러 해 동안 방문진료를 다니며 짧게는 1년, 길게는 10년을 요양원에 누워 억제대에 몸이 매인 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태로 천장만 바라보다 맞이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죽음을 바라보며 문득 그의 죽음은 그 자신의 온전한 의지에 의한 명예롭고 품위있는 죽음이었을까 궁금하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