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재직 때 제안했다 무산
고령 작가 건강 감안 다시 접촉
‘높이 18m 어미홀’ 설명 주효
특정 공간 ‘위치 작업’ 스타일
프랑스서 배로 운송 예산 절감
6시간 30분 다큐 영상도 소개
초기작·근작 등 ‘회고전’ 느낌
관람객 ‘초교 미술’ 처럼 즐겨
미술관의 명성은 ‘세계적인 작가의 전시를 했느냐? 안 했느냐?’로 판명난다. 세계적인 조형예술가인 다니엘 뷔렌의 대구미술관 전시는 미술관의 전시 역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열리는 전시들 중에서도 블록버스터급인 그의 전시가 지난 7월 12일에 성황리에 개막했다.
대구미술관은 개관 초기에 일본의 쿠사마 야요이나 중국의 쟝 샤오강 등 세계적인 동아시아 작가들의 전시를 유치하며 국내·외에 존재감을 알렸다.
이에 반해 뷔렌은 현대미술의 중심부인 유럽에서 거장으로 평가받는다는 점에서 그의 전시 성사는 진일보한 행보로 평가된다.
이번 전시를 성사시킨 일등공신인 대구미술관 최은주 관장은 “3년전에 대구미술관에 부임하고 어미홀을 보는 순간 다니엘 뷔렌의 전시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라고 밝혔다. 뷔렌 전시 개막 후 전국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최근에 뷔렌 전시 관련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를 만났다.
다니엘 뷔렌 전시는 최 관장이 부임하고 야심차게 준비한 기획이다. 최 관장이 경기도립미술관 관장으로 재직하며 미술관 건물 전체를 작품화하는 프로젝트를 뷔렌에게 제안하며 뷔렌과는 인연을 맺은 바 있었다.
경기도립미술관 건물 외벽 유리에 푸른빛이 돌아 “어렵겠다”라는 뷔렌의 판단으로 경기도립미술관에서의 전시는 성사되지 못했다.
비록 당시의 전시는 무산됐지만 최 관장은 뷔렌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쌓인 친분에 만족하고,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을 이어갔다.
특히 2014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 첫 공개된 작품 ‘어린아이의 놀이처럼’을 보고 “언젠가 이 작품으로 꼭 전시를 기획하겠다”라는 뜻을 품으며 후일을 도모했다. 뷔렌의 예술세계에 대한 최 관장의 확신은 대구미술관 어미홀을 만나면서 현실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 어미홀과 ‘어린아이의 놀이처럼’이 만나는 지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미홀은 전시기획자들에게는 실험적이면서도 숙제같은 공간이에요. 로비같은 공간감이 과제이자 실험의 장이 되기도 하죠. 저는 어미홀을 완벽한 하나의 전시장으로 인식했고, 뷔렌의 ‘어린아이의 놀이처럼’만큼 어미홀과 잘 맞는 작품도 없겠다는 판단을 하게 됐어요.”
- 코로나 19의 영향도 있었지만 첫 접촉 후 3년 만에 전시가 성사됐습니다.
“코로나 19로 전시 진행이 미뤄지다 작년 10월에 더 늦어지면 안되겠다 싶어 프랑스로 날아갔어요. 뷔렌 작가님이 84세의 고령이시라 무릎 관절 수술을 하시고 예민한 상태여서 더 늦춰질까 노심초사 하던 차였어요. 그에게 미술관측의 정밀한 계획안을 보여드렸고, 뷔렌이 흡족해하며 승낙 하셨어요.”
- 특히 대구미술관 주변환경과 전시장에 만족감을 표했다고 들었습니다.
“자연에 둘러싸인 대구미술관 환경과 높이 18m, 길이 50m, 너비 15m라는 독특한 공간감을 자랑하는 어미홀에 대한 설명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집 정원을 특색있는 정원으로 조성해 놓을 만큼 자연에서 영감을 받는 작가라는 뷔렌의 특성에 맞게 다가간 전략이었어요.”
뷔렌은 전시공간에서 직접 작품을 제작하는 ‘인-시튜(in-situ)’ 스타일과 특정 공간에서 전시되고 해체된 작품을 또 다른 공간에서 재전시하는 ‘위치 작업(situated work, travail situle)’ 스타일로 작업하는 작가다. 이번 미술관 전시에는 ‘위치 작업’ 형식의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미술관에서 가장 핵심으로 생각했던 ‘어린아이의 놀이처럼’이 프랑스에서 배로 운송하며 예산을 많이 줄였고, 그의 대표작들 중 이미 국내에 소장된 작품들이 있어 그의 예술세계의 정수를 보여주면서도 예산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가 그의 대표작과 근작, 그리고 초기작으로 구성되어 마치 회고전을 보는 것처럼 다채롭습니다.
“저희도 80년 초반의 전위적인 작품들을 예상하지 못했는데 작가님이 먼저 제시를 해 주셔서 깜짝 놀랐어요. 그 작품들이 들어오면서 회고전이라고 해도 될 만큼의 그의 대표작들로 전시를 구성할 수 있었죠.”
이번 전시의 백미는 작품 ‘어린아이의 놀이처럼’이다. 작가는 층고가 높은 공간의 특성을 파악한 후 작품을 배치했다. 2층과 3층에서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는 점은 그가 이전 전시에서 경험하지 못한 특별함이다.
- ‘어린아이의 놀이처럼’에 대한 작가의 공간 해석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자신의 전시 이력에 대구미술관 전시가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점이 될 것이라고 하실 만큼 어미홀의 공간감에 크게 만족해 하시고 그에 맞는 작품 배치를 하셨어요.”
대구미술관 1전시실 공간 해석도 돋보인다. 전시실을 나눠놓았던 벽을 과감하게 제거하여 하나의 공간으로 탁 틔웠다. 벽이 사라지면서 그의 작품들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로 연결됐다. 여기에는 관람자에 대한 그의 배려가 묻어있다. 그는 관람자가 작품을 관람하는 순간을 작품이 완성되는 시점으로 이해하고 있다.
- 과감하게 1전시실의 벽을 없앤 것이 흥미롭습니다.
“대구미술관에서 이처럼 벽면을 완전히 없앤 것은 첫 시도입니다. 뷔렌 작가님의 공간 해석의 탁월함이 작품을 설치해 놓으니 더욱 선명해 지는 것 같습니다. 관람객이 뷔렌의 작품 세계를 한 눈에 확인하며 즐길 수 있으니까요.”
이번 전시에는 6시간 3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영상 작품도 소개되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전시한 작품들을 촬영한 영상에 전시공간이나 작업의 소재나 개념 등의 간단한 그의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전시된 작품의 단순 나열이지만 작품 세계가 워낙 방대하고 변화무쌍하여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흥미롭다. 다음 장면에 어떤 작품이 나타날지 조바심을 내며 기다릴 정도다.
- 6시간 30분 전 분량을 과감하게 상영하기로 결정하셨는데요.
“이번 전시에 80년대 작품과 2015년 이후 작품들로 구성되었는데, 나머지 간극을 메워준 것이 영상이었어요. 영상을 보면 작가의 전체적인 작업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전 분량 상영’이라는 과감한 결정을 하게 됐습니다.”
- 그 긴 분량에 한글 자막 처리를 한 것도 놀랍습니다.
“분량이 워낙 길어서 번역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뷔렌의 작품세계 전반을 이해하는 중요한 영상이라고 생각해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 의외로 그 영상에 관람객들의 반응이 좋다고 들었습니다.
“어린아이들도 그 영상을 떠나지 않고 관람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깜짝 놀랍니다. 뷔렌 작품의 순수성이 아이들의 마음과 소통하는 지점이었던 것이죠.”
- 긴 분량이니만큼 관람이 쉽지 않은데요.
“어떤 관람객은 적어도 세 번은 미술관에 다시 와서 작품과 못다 본 영상을 감상해야겠다고 하셨어요. 그런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전시는 관람객이 먼저 알아본다”는 공식은 뷔렌의 전시에서 또 한 번 입증되고 있다. 개막 42일 만에 61,551의 관람객이 다녀가며 이건희 콜렉션전의 기록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전시 종료일까지 대구미술관 개관 이래 최고 관람객수를 기록한 ‘쿠사마 야요이’전의 기록까지 갱신할 수 있을지에 대한 조심스러운 예상까지 할 정도로, 그의 전시에 몰려드는 발걸음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다. 특히 계층과 세대를 초월한 관람객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 뜨거운 열기의 원동력이 궁금합니다.
“그의 미술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지점은 세모나 네모, 동그라미, 세로줄무늬, 거울 등 개념이나 쓰임이 명징한 재료들을 단순명료하게 구성하며 ‘현대미술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깼다는 것입니다.”
- 세대를 초월하고 계층을 초월할 수 있다는 지점이 흥미롭습니다.
“뷔렌의 작품은 고상한 현대미술이라기보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 그냥 즐겼던 그런 그림 같아요. 그의 작품을 보면 그가 작품을 만들면서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도 그랬듯 관람객들도 그의 작품을 고상한 현대미술이라기보다 초등학교 때 그냥 즐겼던 그런 미술로 생각하며 즐기는 것 같아요.”
-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에 대한 관람팁을 주신다면 무엇입니까?
“자연에서 영감을 받는 뷔렌의 작품은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대구미술관 전시는 뜨거운 여름에 시작되어 초록색이 눈길을 먼저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풍드는 가을과 눈 내리는 겨울에 다시 한번 더 만나신다면 또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