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취소부터 먼저
[달구벌아침] 취소부터 먼저
  • 승인 2022.09.14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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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호 BDC심리연구소 소장

우리 삶에는 시작 버튼도 있지만, 취소 버튼도 있다. 새로이 어떤 일을 하려거든, 기존의 낡고, 케케묵은 좋지 않은 습관은 버려야 한다. 즉, 기존 것에 대한 취소 버튼부터 눌러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그대로 둔 채 아무리 좋은 것을 배우고 습득해도, 소용이 없다.

하루는 일찍 일어난 탓에 여유로운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가족은 모두 아직 꿈나라에서 양들과 놀고 있었다. 이때다 싶어 가족을 위해서 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솥에는 한 사람이 먹을 양의 밥이 있었다. 밥을 그릇에 덜어내고 냈다. 이제 숨겨온 나의 실력을 보여줄때가 왔다. 적당히 씹는 맛이 있도록 꼬슬꼬슬한 밥을 해 보겠노라고 하얀 쌀과 잡곡을 물에 깨끗이 씻었다. 그러고 나서 취사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아무리 눌러도 취사는 되지 않고 여전히 보온상태로 남아 있었다. '고장 났나?' 'AS를 맡겨야 하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멋지게 폼은 잡았는데 기계가 받쳐주지 않는다. 그렇게 밥솥 앞에서 한참을 실랑이하다가 어느 순간 보이지 않던 취소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한번 눌러보자 싶어 버튼을 눌러보니 "보온이 취소되었습니다"라는 음성이 나온다. 그 후 취사 버튼을 누르니 '잡곡, 쿠쿠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라는 아리따운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그제야 밥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별것 아니었지만 작은 일에 큰 기쁨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그날도 나는 밥솥 스승님으로부터 한 수 가르침을 받았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취소부터'라는 것을.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너무 모르는 것이 많다. 그리고 배울 것이 너무 많다. 선생님을 통해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밥솥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인생의 법칙을 배울 수 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사람과, 사물이 스승으로 보이는 법이다.

사람은 평생을 배운다 했다. 그래서 평생 공부, 평생교육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평생교육원이 생겨나고, 배우기를 멈췄던 세대들이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글을 배우는 사람부터, 지식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취미의 확장을 위해 많은 이들이 배우기를 시작 했다.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다. 본인도 평생교육원에서 교육을 많이 해봤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한 사람들을 위해 사회복지관련 강의를 했고, 요양보호사 자격증 교육도 했고, 심리학 관련 수업도 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교육은 은퇴하신 사람들을 대상으로 15주간 실시된 '웰다잉' 교육이다. 모두 나이가 지긋하셨다. 15주가 진행되는 동안 그분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결석을 하지 않으셨다. 여느 대학생들보다 더 열정적이고, 반짝이는 눈으로 배움을 하고 계셨다. 그렇게 열심히 수업에 참여하고 나서 그분들은 스스로 웰다잉(well dying) 한다는 것은 웰빙(well being) 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으셨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유럽에서는 증류하는 술보다 발효시켜 마시는 포도주가 대부분이었다. 포도를 수확하여 포도주를 만들 때 반드시 새로운 가죽 부대에 술을 보관했다고 한다. 그런데 처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을 때는 사용을 많이 한, 부드러운 오래된 가죽 부대에 보관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발효가 되면서 가죽 부대가 터져 버리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낡고 오래된 부대에 담으면 새 술(포도주)이 발효하면서 가스가 생겨 결국에는 낡은 부대가 터져 버린다. 그렇게 되면 맛있는 술도 못 먹게 되고, 부드러운 가죽 부대도 버려야 한다. 이렇게 무언가를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한다면 기존의 것은 버려야 한다. 기존 것이라 하면 늘 해오던 오래된 습관일 수도 있고, 스스로 만든 하나의 규칙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전 것이 모두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최소한 여기에서 말하는 것에서는 이전에 해오던 방식에 대한 취소 버튼을 누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살면서 시작 버튼에는 관심도 많았고 실행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취소 버튼에는 그렇게 관심을 가지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취소 버튼을 누르려고도 잘하지 않았던 것 같다. 미련처럼 이전 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로운 것에 욕심을 내었던 것 같다.

이제 새로이 하나를 깨달았으니 내 삶에 적용해 보기로 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새로운 일을 하려거든, 이전 것의 낡고 오래된 것들에 대한 취소부터 먼저 해야 할 것을 살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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