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를 찾아서] 그 상추
[좋은시를 찾아서] 그 상추
  • 승인 2022.09.20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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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조 시인


땡볕에도 상추는
제 크기 자랑하느라
내 허리까지 자라곤 했다

잎을 따내면 흐르던 하얀 즙
누런 된장에 상추쌈 먹고
잠들던 아이가
어른 앞에서 눈 홀길까 조심조심
입 벌리던 그 아이가
두레박으로 퍼 올린 물 앞에서
멸치처럼 푸른 등 적시는 등목에도
눈 한번 껌벅이지 않는다

상추가 키워낸 고향의 아이들은
세파의 밭고랑 뒤적이며
잘 살고 있을까
땡볕 쨍쨍한 날에 모여
상추쌈 먹고
동리나무 삼백년 그늘에 가볼까

◇곽태조= 1933년 경북 선산 출생, <수필춘추>와 <문장>에서 수필과 시로 등단, 수필집 <그 때> 발간, 경상북도교육청 장학사, 장학관, 김천시교육장 역임, 현 대구문인협회 회원

<해설> 우리는 언제나 잃어버린 것들 속에 있다. 시간의 향기는 별들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무게다. 이 순간 우리의 자화상은 밭고랑이 희미해져 궤도를 잃은 것들이다. 세파에 여백이 사라져도 향기를 지닌 것들은 중력을 잃지 않는다.

자연철학을 기웃거리며 오지 않을 미래를 생각하느라 써버린 생의 절반. 시간의 수레를 돌리는 신을 믿지 않는 신은 오늘도 쓰레기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 바람은 먹구름을 오독하고 긴 처마 끝에 걸린 오래된 시간을 수신한다. 푸른 등 향기가 미치는 곳까지가 마음의 거리라면, 아무리 소리를 내어 책을 읽어도 가난해지지 않는 새들이 사는 행성에 밤이 든다.

벌써 죽은 태양을 보며 어리석어서 살아남았고 오해로 여기까지 왔다. 어떤 날 선반 위에 제목 없는 책 한 권이 차갑게 시든 초침소리에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어두운 욕망을 길어 올렸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마주친 시간의 무늬가 새겨진 낡은 의자에 앉으니, 오래된 미래는 거대한 욕망과 풍요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빚은 역설이었다.

살아가는 동안 문득, 기다림이 사라진 거리엔 몇 그루의 나무가 필요할까. 내 익명의 섬들이 흘러흘러 그나마 여백도 사라지면, 저 세상 끝에서 신선한 미래를 파는 시간의 상점이 문을 연다. 무얼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기다리는 부재는 우리의 오랜 존재방식이었다. 언젠가 우리도 땀이 말라 뽀송한 시간이 오면 환한 표정과 말쑥한 얼굴로 나무보트를 탈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새들처럼 떼를 지어 비상하며 시원한 궤적을 그릴 것이다.

-성군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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