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아침] 이 가을, 어떤 향기가 추억이라는 우리 안으로 우리를 데려갈까
[달구벌 아침] 이 가을, 어떤 향기가 추억이라는 우리 안으로 우리를 데려갈까
  • 승인 2022.09.25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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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다시, 구월이 왔다. 보름달이 둥실 떠오른다. 명작이다. 올해 뜬 달은 유난히 더 크고 생생해 보인다. 나를 비롯해 달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소원을 빈 사람들의 바람이 모두 다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달이 차고 기울어 다시 차오르듯 그 모든 소망이 하루하루 살아내는 힘의 원천이 되기를 빌어본다.

눈으로 보는 것은 사진으로 찍어서 다시 볼 수 있다. 귀로 들을 수 있는 것 또한 녹음이라는 과정을 거쳐 다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코로 맡는 냄새는 어떻게 해야 다시 맡을 수 있을까. 냄새로 기억되는 것들이 있다. 음식 준비며 손님을 치러야 하는 일까지 준비할 것들도 많고 고된 길이라지만 그보다는 설레는 마음이 더 크게 다가온다. 길게는 반년 짧게는 일상처럼 늘 부대끼며 사는 가족들과 둘러앉아 나눠 먹는 명절 음식은 평소와는 맛과 향이 다른 ‘특별식’이다.

주로 기름진 음식들이 대부분이라 칼로리가 걱정되기도 하지만 ‘추석이니 명절이니, 다시 또 언제 먹어볼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먹다 보면 과식하기에 십상이다. 김치찌개 냄새를 상상하기만 해도 금세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것처럼 그 사람, 그곳, 그 시절을 떠올리면 코끝에 내려앉는 뭉클한 냄새가 있다. 냄새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냄새나 향기야말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일이라는 것을. 잊히지 않는 잔향을 남기거나 공간이나 시간을 남긴 사람들이 그리움과 함께 세월이 덧대질수록 애틋함과 감사함이 더해지는 것만 같다.

연휴가 끝날 즈음, 남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집까지 무사히 잘 도착했는지 묻기도 전 대뜸 ‘누나 고마워’ 한다. 목회하며 살다 보니 막상 자식 노릇 한 번 제대로 못 할 때가 잦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더군다나 명절이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먹는 음식들로 인해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더부룩할 때가 많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만들어 준 매실차를 마시며 들끓는 속을 달랜다고 한다. 일반 매실차와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막상 혀끝에 와 닿는 느낌이 다른 것과 비교해 확실히 다르다며 작품을 음미하듯 ‘명장의 명작’을 마시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매향이 살아 있어 좋고 오랜 시간 정성을 들인 맛이 마실 때마다 느껴진다며….

“누나, 배가 터지도록 소갈비를 뜯고 왔는데 왜 헛배만 잔뜩 부른지 모르겠어. 명절이라 그런가. 아니면 나도 늙는지. 벌써 내가, 나를 앞세워 친척들이며 집안 어른들 인사 다니러 가자며 애쓰시던 아버지 나이가 되었어. 그때 좀 따라다녀 줄걸, 아내도 자식도 내 뜻대로 잘 안 되는 것 같아 맘이 헛헛해. 그럴 때 누나가 준 명작, 한 잔 음미하고 나면 기운이 나. 누나 미안해.”

동생의 전화를 끊고 나는 한참 동안 먹먹해졌다. 달은 그냥 달이라서 좋다. 해와 달리 오래 바라보고 앉았어도 눈부시지 않아서 더욱 좋다. 모양이 변하든 변하지 않던, 초승달이든 보름달이든 어둠을 밝히는 그윽한 빛이며 그저 하늘에 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희망을 품게 하듯 가족이란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보름달처럼 다시 또 언제 만날지 모를 그리움을 한 아름 담고 오기 때문일까. 떠날 때의 마음보단 돌아올 때의 마음이 더 깊고 무거워진 느낌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새롭게 맞이할 가을을 기대하며 평화로운 오늘을 맞이하기를. 이제 슬슬 제자리로 돌아올 준비를 해야 할 시점이다. 먹고 마시고 쉬며 좀 둔해진 몸과 어딘가로 떠나 돌아올 생각을 놓친 채 헤매고 있을 그 마음 한 조각마저 다 데리고.

이 가을, 어떤 향기가 추억이라는 우리 안으로 우리를 데려갈까. 얼마 전, 노후화로 인해 가동을 중단했던 백남준의 ‘다다익선’이 보수와 복원 작업을 거쳐 폐기되지 않고 다시 불을 켜게 되었다는 기사와 함께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그의 또 다른 작품을 떠올렸다. 현대의 삶은 그 시절의 기억을 거의 잃어버리고 텔레비전의 차가운 빛이 달빛을 대신하게 된 듯하다.

음식을 먹고 체했을 때 바늘을 흰 머리카락 위로 한 번 쓱쓱 문지르고는 다시 호롱불에 달군 후 손톱 아래를 한 방에 찔러 따 주시던, 검붉은 핏방울이 송골송골 나오면 그제야 마음을 쓸어내리며 등을 토닥여주던 외할머니가 보름달 안에서 박꽃처럼 환하게 피어난다. 동생의 말과 함께 내 맘에 달빛처럼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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