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가을 스케치 (2)
[문화칼럼] 가을 스케치 (2)
  • 승인 2022.10.12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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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국 칼럼니스트
몸이 불편할수록 마음이 편해지는 곳, 그곳 자연으로 떠나야겠다고 집을 나섰지만 때때로 막막해 진다. 어디로 가야하는가? 내가 떠날 길은 어디인가? 이런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아무튼 가을은 길 떠나기 좋은 계절임은 틀림없다.

집을 나선 개천절 아침에는 날이 궂었지만 다행히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 비는 그쳤다. 이날은 술·담배를 하지 않고 대신 차와 커피 그리고 걷기를 좋아하는 후배와 동행 했다. 이 친구는 사나흘 길도 즐겁게 걸어서 가는, 그야말로 풍류를 아는 걷기 마니아라고 할 수 있다. 당초 둘이서만 길을 나서기로 했다가 뜻하지 않게 열 명 정도 함께 하게 되었다. 나 외에는 모두들 틈만 나면 서로 어울리는, 어떻게 보면 걷기와 음식을 통한 공동체를 꾸려가는 가족 같은 사람들이었다.

구룡포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에 차를 두고 해파랑 길을 거꾸로(?) 걸어갔다. 역시 예상대로 태풍 '힌남노'의 상흔이 아직 곳곳에 남아있다. 가는 길의 마을에서 만난 어르신께 "이번 태풍에 피해는 없으신지--- 무탈 하셨습니까?"라는 나의 인사에 대꾸도 없이 씁쓸한 미소만 지으신다. 태풍이 닥쳤을 때를 생각하며 걷는 바닷가 마을은 하나같이 위태로워 보인다. 테마 공원에서 흥환 간이해수욕장 가는 길은 바로 해안가로 딱 붙어 가게 되는데, 어떤 곳은 바다 위에 나무 데크를 깔아 놓아 파도에 깎인 해안 절벽 그리고 해국 군락지를 감상할 수 있다. 날이 흐리고 옅은 해무가 깔려 수평선도 보이지 않는 바다는 그야말로 호수처럼 고요하다. 가을날이라고 하기 에는 습하고 더워 바다에 뛰어 들고 싶은 날씨였다.

우리 일행은 모두들 서로의 걸음걸이를 의식하지 않고 각자의 속도에 따라 걷다가 적당한 지점에서 만나 차 한 잔, 간식을 담소 속에 나누고 또 같은 흐름으로 걸었다. 한 낮이 되어 햇살이 나기 시작하니 여름 같은 날씨다. 온몸은 땀에 젖어도 오랜만에 걷는 해변 길에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다. 포항 시내로 다함께 이동하여 늦은 점심으로 맛있는 음식을 나누었다. 뜻하지 않게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걷기였으나 서로를 의식하지 않게 배려해준 덕에 마음 편하고 즐겁게 다녀올 수 있었다.

지난 주 한글날 연휴를 맞아 대구로 내려온 딸과 며칠간 함께 지냈다. 당초 둘이서 남해로 백패킹을 떠나기로 했으나 나의 몸살기로 인해 가지 못했다. 대신 맛있는 음식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중 하루는 물방울 화가로 유명한 김창열을 그의 아들이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를 감상했다. 전쟁의 와중에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그 자신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화가는 뉴욕생활을 거쳐 백남준의 초대로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가슴 깊숙이 박힌 죄책감과 슬픔, 고독을 그림으로 표현하던 김창열은 마침내 파리에서 우연히 물방울에 눈을 뜨고 그때부터 50여 년 간 이것만 그리게 된다. 그는 "물방울을 그리는 건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다. 모든 악과 불안을 물로 지우는 거다."라고 말한다.

그 시대 많은 아버지처럼 아들에게 비친 김창열은 '늙은 남자이자 고집 센 어린아이'로 묘사된다. 매사에 정중하고 조심하며 고독한 가운데, 듣되 말은 하지 않는 김창열은 그림으로 세상을 향해 말을 하고 마침내 일가를 이룬다. 제주도에 기증한 200여점의 작품을 바탕으로 개관한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개관식에서 그는 "달마대사가 면벽으로 도를 깨우쳤다면 나는 물방울을 그리는 것으로 그것을 추구한다. 하지만 달마대사가 9년 만에 득도한 반면 나는 아직도 세속적 인간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소설가 박완서가 전쟁의 와중에 겪은 깊은 상처를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의 자전적 소설을 통하여 그렸다면 김창열은 그림을 통하여 그러했다. 박완서가 자신이 글을 쓸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걸을 땐 걷는 생각만 해라." 이 한마디였다고 했다. 김창열은 산만해 보이는 아들에게 "밥 먹을 땐 밥만 먹어라"라고 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기도 한 이런 면모는 명상의 기본이기도 하다. 일생을 통하여 명상을 실천하며 철학적 공부에 매진한 김창열의 물방울은 이제 나에게는 이전과 다르게 다가온다.

나의 딸은 같이 스터디 하는 이들과 베네치아 비엔날레도 다녀올 만큼 그림을 좋아한다. 아들이 보여주는 아버지의 모습, 그것도 화가 아버지를 그린 영화에 딸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생각하며 극장을 나서니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추억의 맛 집 '국일따로' 에서 늦은 저녁을 함께 나눈 가을날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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