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손갤러리, 안창홍 ‘미완의 리허설’展
우손갤러리, 안창홍 ‘미완의 리허설’展
  • 황인옥
  • 승인 2022.10.12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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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만 덩그러니 남은 ‘유령패션’
현대문명·물질 만능주의 비판
소시민 형상화한 ‘얼굴’ 연작
사회 약자 향한 애정 드러나
그로테스크 분위기에 점묘 가미
첫 ‘폭풍이 지나간…’ 연작 공개
회화·설치·조각 등 다양한 작업
무거운 주제 아이 놀이처럼 소화
안창홍작가-화가의심장
안창홍 작가가 우손갤러리에 전시된 작품 ‘화가의 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평생에 걸쳐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사람을 만나면 숙연해진다. 누구라도 어느 한 시절 신념을 불사를 순 있지만, 살다보면 살기 위해 타협하는 경우를 흔히 보기 때문이다. 중도 포기하는 범인(凡人)의 입장에서 보면 올곧게 외길을 가는 사람에게서 숭고함을 발견하고 찬사를 보내기 마련이다. 이인성미술상(2009)과 이중섭 미술상(2013), 프랑스 카뉴 국제회화제 심사위원 특별상(1989) 등 국내외의 권위 있는 미술상에서 안창홍 작가를 선택한 것은 평생에 걸친 그의 신념에 대한 인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지난 50여년간 소위 말하는 잘 팔리는 매끈한 그림보다 불편함을 건드리는 거친 작업들로 예술적 과업을 수행해왔다. 소외되고, 상처받고, 어두운 존재들을 환한 빛 아래 꺼내 놓으며 그들을 위무(慰撫)했다.

최근 개막한 우손갤러리 개인전에 소외되고 어두운 곳을 애정하고 특별하게 감각하는 안창홍 예술의 정수들이 모였다. 화가의 꿈을 꾸던 고등학교 시절의 드로잉부터 최근 신작인 ‘유령패션’ 연작까지, 회고전을 방불케 하는 작업들이 관람객과 만나고 있다.

평생에 걸쳐 그가 추구했던 다양한 신념들 중에서 첫 번째 신념은 대학 교육 거부였다. 고등학교 미술부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미술 대학 진학이 기정사실화 되었지만, 그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미술대학이 화가에게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인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학교를 다닐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며 독자 노선을 선택했다. 학업 대신 그림과 직업 활동을 병행하며 내재된 자유분방함을 발현하려는 것이 당시 그의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유행과 제도에 편승하지 않으면서 고유한 작품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있었던 원천에 그의 특유의 자유분방한 기질이 자리한다.

그는 “당시에 ‘화가가 그림만 잘 그리면 됐지 더 이상 뭐가 필요한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고 했다. “틀에 박히거나 일반화된 활자를 통한 지식 쌓기보단 삶을 통해, 관찰과 경험을 통해 보고 받아들이고 고뇌하는 것이 화가의 길이라는 신념이 확고했고, 그것이 결국 오늘의 안창홍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을 예술적 과제로 삼다

50여년에 걸친 작업은 그야말로 방대하다. 작품 속에 깃들어있는 발언들도 방대하고, 회화, 설치, 부조, 조각 등의 조형적인 표현방법도 다채롭다. 세상에 대한 관심의 폭이 넓고 틀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그의 기질적 특성의 결과다. 하지만 방대함 속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 하나는 끝까지 놓지 않고 견지했기에 인생과 예술에 대한 다양한 탐구심을 평생 놓지 않고 진행할 수 있었다. 그 주제가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권력의 속성을 꿰뚫고, 인간 내면의 탐욕이나 야만성과 마주하려 했다. 특히 그의 의식은 권력과 탐욕으로부터 소외되고 상처받는 존재들에 머물렀다. 소외된 자들을 향한 연민과 공감은 그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다.

그가 “구원”을 이야기했다. “‘예술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로부터 저의 예술이 출발해요. ‘부잣집 벽에 걸린 벽걸이용이나 내 자신을 구원해야 할 예술이냐’라는 것이죠. 저는 제 미술이 저 자신을 구원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치유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안창홍작가-우손갤러리
안창홍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우손갤러리 전시장 전경

◇ 개인사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주제 파고들다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은 개인사와 사회적인 맥락들이 맞물리며 서술됐다. 개인사로부터 출발한 대표작은 이번 전시에 소개되고 있는 ‘가족사진’과 ‘화가의 손’ 연작 그리고 ‘화가의 심장’ 연작이다. 그는 산업화 과정에서 가족의 와해를 겪었고, 중학교 때부터 경제적인 독립을 해야 했다. 초기작인 ‘가족사진(1979-80)’ 연작에 자신의 가족사가 아프면서도 애잔하게 녹아있다.

높이 3m, 가로 2.2m에 달하는 거대한 부조인 ‘화가의 손’ 연작은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어 백골이 되어서도 붓을 잡아야 하는 화가의 숙명에 대한 형상화다. 말하자면 화가로 살아가는 자신의 자화상인 셈이다. 작품은 백골이 된 손을 중앙에 놓고 쓰레기통에 담겨있던 물건들을 붙여 완성했다. “우연히 작업실 쓰레기통에서 백골이 된 손의 환영을 보고 작업”했다는 것이 ‘화가의 손’ 작품의 탄생 비화다.

개인사도 그렇지만 사회적인 통찰에서는 더욱 거칠고, 한층 더 따뜻하다. 소시민이 역사의 주체임에도 역사가 기득권자들의 기록으로 남는다는 현실을 준엄하게 바라보며, 익명의 개인들, 약자들, 소시민에 시선을 둔 결과다. 그는 권력자의 역사에 소외되고 잊혀진 ‘평범한 사람들’을 환한 불빛 아래로 끌어올리며 위로를 건네려 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유령패션’ 연작과 ‘얼굴’ 연작은 사회적인 통찰에 대한 대표작들이다. 사람의 몸이 빠져 나가고 덩그러니 남은 옷을 그린‘유령패션’ 연작은 “물질만능 사회의 공허함”을 표현했다. 인간이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며, 부(富)와 계급의 상징인 패션에서 공허함을 발견했던 것. “명품 옷을 입고 한껏 멋스럽게 포즈를 취하지만 공허합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가장 손쉬운 방법이지만 패션만 있고 사람은 없죠.패션이야말로 인간 허상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얼굴’ 연작은 소시민을 향한 주제의식의 한 축에 해당된다. 민중의 얼굴이자 시대의 표상으로서의 인간을 형상화한 부조 작품이다. 시골에서 흔히 만나는 할머니의 얼굴부터 거리에서 만나는 이름 없는 민초들을 주인공으로 했다. 이 작업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비감이 교차하는 익명성의 광장(廣場)에 바치는 그의 서사시다.

“흔히 역사라고 하면 권력자 이미지만 떠올리지만, 그 뒤안길에 소외되고 희생된 사람들은 보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잊혀진 익명의 얼굴들을 그립니다.”

이번 전시엔 최초로 소개되는 개인 소장품 ‘폭풍이 지나간 후’ 연작도 걸렸다. 아마란스 꽃밭에 야생풀이 뒤엉키며 일어나는 생존의 몸부림을 그린 작품이다. 실제로 작가가 조성한 작업실 앞 화단 풍경이며, 이전의 자유분방한 그로테스크 미학에 바탕을 두었던 전형적인 안창홍의 시선에 점묘적 표현을 가미하면서 매우 사실적인 회화성이 빛을 발하고 있다.

“야생의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인간의 몸부림을 보았어요. 서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생존경쟁의 장이었죠. ‘폭풍이 지나간 후’ 이전 몇 해 전에 발표한 ‘맨드라미 꽃밭’엔 세월호 사건이 터진 직후여서 비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어요.”

◇ 작업을 놀이처럼 접근하다

사용하는 매체가 다채롭고, 주제 또한 진중하지만 작업은 놀이처럼 유쾌하다. 작품 ‘얼굴’ 연작의 제작 과정은 흙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의 놀이를 닮아있다. 먼저 마당에서 호미로 얼굴 형상을 음각한 후 시멘트를 붓고 말린다. 그리고는 말린 얼굴에 드로잉을 하고, 주변 땅바닥에서 플라스틱 단추 등 필요한 것들을 주워서 붙이면 어디서나 만날 법한 친근한 얼굴이 완성된다. 작품 ‘유령패션’은 스마트폰에 놀이처럼 그린 디지털 펜화에서 출발했다. 이후 회화와 설치 등 다양하게 변주했다.

“예술이라는 것이 사실 놀이로부터 시작한 거잖아요. 제 작업은 놀이와 호기심의 창조적 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업이 확장되는 과정도 놀이처럼 흥미진진하다. 이전 작품의 한 부분이 새로운 시대와 만나며 하나의 개념으로 성장하고 외연을 확장하며 연작으로 탄생한다. ‘유령패션’은 1979년작인 ‘인간 이후’에 등장한 표상을 발아시켜 새로운 하나의 숲으로 키워낸 작품이다. “79년 작품 속 한 명의 유령이 시대를 관통하며 내적 성찰을 하고 의미를 좀 더 강화하여 또 다른 작품을 탄생시키며 작업의 확장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폭풍이 지나간 후’ 연작도 고등학교 때인 71년도에 그린 작품인 ‘사르비아 꽃밭’에서 발아해 새롭게 열매를 맺은 결실이다.

그에게 미술은 자유의지의 표현이자 시대정신의 산물이다. 시대의 부조리에 대한 대응이자 저항이자 증언이다. 그는 권력이나 자본에 휘둘리지 않으려 평생 노력했고, 세상의 중심에서 균형감각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 실천적인 행위가 작업이었다. 힘이 들어도 자기 언어를 개발하려 고군분투했고, 자신의 향기로 세상과 소통하는데 평생을 걸었다. 상업 화랑과의 불화도 마다하지 않은 것은 그가 얼마나 신념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했던가를 대변한다.

“제가 살았던 이 시대의 아픔과 진통을 먼 훗날의 사람들이 제 작품을 통해 느낀다면 그것으로 저는 행복할 것입니다.” 안창홍의 우손갤러리 개인전 ‘미완의 리허설(Unfinished Rehearsal)전은 12월 3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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