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그릇
[달구벌아침] 그릇
  • 승인 2022.10.16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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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 주부
결혼 전 신혼살림으로 장만하는 것 중 하나가 그릇이다. 음식을 자주 해 먹든, 해 먹지 않든 식탁과 더불어 그릇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고른다. 함께 음식을 먹을 때 분위기를 위해서이다. 홍희가 결혼 전에 산 그릇은 청자색에 무늬가 있는 그릇이었다. 살림살이에 눈썰미가 없었고 관심도 없었고, 같이 봐 주러 간 사람이 없어서 주인이 권하는 말에 그냥 넘어갔다. 자주색 나무 위에 놓아둔 그릇이 품격이 있어 보였다. 그렇게 주인이 말했다. 하얀색만 있는 그릇은 너무 단조로워 보였고 꽃무늬나 도형같은 무늬가 있는 그릇은 어지러워 보였다. 심심하지 않으면서도 무게감이 있는 청자색 그릇이 좋아보였다. 손님이 올 경우를 대비하여 밥그릇과 국그릇은 10개씩 더 샀다.

결혼 후 집들이, 처음 시부모님 생신상, 첫 아이 돌잔치, 처음으로 산 집 집들이를 할 때 요긴하게 썼다. 그리고 장롱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필요한 몇 개의 그릇만 있어도 일상생활에 충분하였다. 쓰지 않는 그릇이 많아서 새로 나온 가볍고 깔끔한 그릇을 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릇보다는 그릇에 담긴 음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음식의 맛, 음식의 때깔, 음식의 영양이 그릇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릇보다는 음식메뉴를 고르고 재료를 사고, 요리하기에만 신경쓰기에도 하루하루 일상은 바빴다. 그깟 그릇이 뭐가 대수야. 내용물이 중요하지. 그런 생각이었다.

화분을 키우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릇도 중요하다. 처음 키울 때는 사무실에 있는 투명 컵에 심었다. 오래된 화분이 주인이 없거나 받은 경우도 있었다. 화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자라는 식물이 잘 자라는 게 중요했다. 잎 하나, 줄기 하나를 꽂아두었는데 뿌리가 생기는 게 신기했다. 작은 잎이 점점 커지는 것은 하루하루 즐거움이었다. 어디에 심었느냐 보다는 얼마나 잘 자라는가가 관심사였다. 개수가 점점 많아지고 크기가 커지는 변화가 시간의 흐름을 알게 해 주었다. 어느 시기가 되자 더는 개수를 늘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크기도 어느 정도 커지면 어제와 오늘이 비슷비슷했다. 뭔가 하루하루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웠나보다. 지루한 일상에, 매일같이 반복되는 사무실 업무에 생기를 불어주는 변화가 좋았나보다.

변화가 멈춘 것 같은 그 때 화분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예쁜 화분에 심어 놓은 한 두 개가 예뻐보였고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았다. 그래서 화분을 한 개씩 사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개 정도 식물에 어울릴만한 화분을 사서 옮겨 심는 것이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이번에는 어떤 식물을 어떤 화분에 옮겨심을까 생각하고 찾아보는 것도 즐거웠다.

까만 장독같은 화분이 생겼다. 하얀 가루같은 것도 묻어있었다. 무엇을 심어도 어울릴 것 같지 않았는데, 고심하다가 꽃기린을 심었다. 빨간색 꽃이 사계절 내내 피는 식물이다. 둘이 찰떡궁합이었다. 장독 위에 핀 봉선화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화분도 멋있고 꽃기린은 자태를 뽐내었다. 이후로 화분 재정비에 들어갔다. 이미 심어놓은 화분을 보며 서로 어울릴만한 것들을 대 보고 옮겨심기 시작했다. 화분의 대이동이 시작 되었다.

음식담을 그릇보다 내용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화분은 꽃과 잘 어울리는 그릇이 더 중요했다. 꽃과 식물을 더욱 생기있고 멋지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내 옆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나를 담는 그릇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꽃이나 식물같은 사람인가? 그릇보다 중요한 음식 같은 사람인가? 또는 남을 품어주고 더욱 돋보이게 해 주는 그릇같은 사람일까? 나는 남을 품어주는 그릇보다는 음식과 꽃에 가깝고, 어떤 그릇에 담기느냐에 달라지는 꽃과 같은 사람이 아닐까?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나라는 사람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다시 생각해본다. 그릇이 큰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릇’조차도 안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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