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영 개인전 봉산문화회관
이춘영 개인전 봉산문화회관
  • 황인옥
  • 승인 2022.10.2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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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하는 삶 살다 정착하고 싶었나 봐요”
부산·서울·인도 거쳐 청도로
작업 소재도 잎·꽃 거쳐 뿌리
30차례 작업 거친 신작 20여점
‘침잠’ 안착한 작가 내면 대변
자연 생명성 통해 위로 받으려
공공미술 관심 많아 벽화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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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영 작 ‘침잠’

인간은 애초부터 ‘노마드(nomad·유목민)’로 규정지어져 태어났는지 모른다. 태어난 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평생 살다 죽음을 맞이했던 그 옛날부터, 몸은 정착해 있을지언정 생각은 끊임없이 허공을 부유했기 때문이다. 교통의 발달과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이제는 시공간적인 이동까지 자유로워지며 인간은 완벽한 ‘노마드’로 거듭나고 있다.

이춘영 작가는 인간의 노마드적 기질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젊은 시절에는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유학하고 정착했다. 하지만 자녀가 대학에 입학하고 여유가 생기자 또 다시 인도 국립대학 A.D과정(테라코트)에 입학했다. 한동안 인도에서 학업과 작업을 이어갔다.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자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작업실을 마련하고 창작활동을 본격화했지만 그것도 잠시, 2013년에 다시 청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유목적인 삶을 지속했다. “많은 시간을 유목민처럼 떠돌았어요. 환경적인 요인과 저의 의지가 결합된 유목적인 삶이었지만 그때마다, 제 삶에서의 의미를 찾고 작업으로 승화하려 노력했어요.”

삶의 터전을 옮길 때마다 작업 또한 변했다. 하지만 터전이 어디든 그의 의식에서 울려 퍼지는 공명의 대상은 언제나 자연이었다. 특히 식물의 씨앗이나 뿌리에 마음을 빼앗겼고, 부지불식간에 작업 과정에 그것들이 불쑥불쑥 자리를 잡았다. 그가 “부유하는 삶을 살면서 의식 속에 ‘정착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나 봐요. 저도 모르게 자연, 그것도 생명의 근원인 뿌리나 씨앗에 마음을 빼앗긴 것을 보면 말이죠.”

이춘영 개인전이 봉산문화회관 3전시실에서 진행 중이다. 닥나무 뿌리를 캔버스 위에 붙이고 물감을 붓고 말리는 작업을 많게는 30여 차례 진행해 밀도를 더한 신작 ‘침잠’ 연작 20여점을 모았다. 닥나무 뿌리를 오브제로 사용한 신작은 ‘뿌리 회화’로 불린다. ‘뿌리 회화’ 이전 작업에서는 씨앗이나 나무의 뿌리를 흙과 물감을 섞은 물성으로 드로잉 하는 기법으로 표현했다.

“한지를 사러 갔다 버려진 닥나무 뿌리를 보고 생명의 근원에 더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겠다 싶어 작업의 재료로 채택하게 되었어요.”

‘뿌리 회화’를 본격화한 것은 이번 전시부터지만 이미 닥나무 뿌리를 채택하면서 물성연구를 시작했다. 원재료인 닥나무 뿌리는 이미 오랜 시간 말려져서 뒤틀림은 없었지만, 오브제로서의 물성은 그가 경험하지 못하여 연구는 필수였다. 뜻이 있으면 길도 있는 법. 여러 번의 실험을 거치면서 재료로서의 가능성을 확장해갔다.

닥나무 뿌리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자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캔버스 위에서 닥나무와 물감의 놀이는 의외성을 끌어들이며 흥미진진해졌다. 오브제는 밀착, 물감은 뿌리기의 중첩으로 가닥을 잡았다. 닥나무 뿌리를 붙인 캔버스 위에 물감을 붓고 펴 바른 다음 말린다. 붓고 말리는 과정은 많게는 30여차례 반복하며 표면의 밀도를 높인다. 두세 가지의 색상을 중첩해 붓기도 하지만 최종 결과는 단색으로 갈무리된다. 캔버스도 무거운 나무에서 가벼운 알루미늄으로 교체했다.

“작업하기 좋은 최적의 환경을 찾으면서 작업도 정착할 수 있는 지점을 찾은 것 같아요. 이제는 저도 작업도 뿌리를 내리고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아요.”

삶의 방식이 노마드였듯, 작업도 노마드처럼 부침이 많았다. 캔버스에서 도자기(세라믹) 표면으로, 다시 캔버스로 변화를 부활했다. 소재도 식물의 잎이나 꽃 등을 추상과 구상의 혼합으로 표현하다, 점차 뿌리와 씨앗 등의 근원적인 요소로 회귀해갔다. “캔버스든 도자기 표면이든 제게는 그림을 그리는 표면이라는 지점에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죠. 자연의 생명성을 통해 위로와 치료를 받는 것이 핵심이죠.”

세라믹 기법은 인도의 산티니케탄에서 3년을 보내면서 시작했다. 야외에서 가마를 만들고 그 속에 도자기를 넣어 불을 지피는데, 일정한 온도가 되면 나뭇잎이나 벼 이삭 등을 넣고 가마의 구멍을 막아 소성하는 방식에 매료됐다. 이 시기 도자기 표면에 그림을 그리기 전 드로잉을 많이 했는데, 목탄과 먹으로 작품화하기도 했다.

그가 “가마 속 불빛에는 번민과 미혹의 열정들이 뒤엉켰다. 긴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산티니케탄에서 만난 자연인 새와 물고기, 꽃과 나무와 열매들 그리고 뜨거운 햇살과 푸른 밤하늘의 별들을 세라믹 표면에 세기며 그리운 체취들을 붙잡았다”고 했다. “가마 속에서 너무 익어서 문양이 새까맣게 나오기도 하고, 설익어서 허옇게 나오기도 하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때론 하나의 작품에서 여러 흙빛이 스며 나오기도 하죠. 그때의 오묘함이란.”

캔버스 작업을 하면서 벽화도 병행했다. 벽화 작업은 공공미술에 대한 관심으로 도전했다. 미술이 특정계층의 향유물이라는 이미지를 걷어내고 만인과 소통하고 싶은 욕망의 발로였다. 하지만 더위와 추위 등 외부 환경의 제약, 약해진 체력으로 힘에 부쳐 지금은 실내 작업에만 집중하고 있다.

“벽화는 만인에게 노출된다는 장점이 있어 매력을 느꼈어요. 누구나 미술을 접할 수 있어 미술의 소통력을 높여주죠. 제가 추구하는 미술은 그런 것인데 육체적으로 힘들어 쉽지 만은 않았어요.”

닥종이 뿌리와 색면의 만남으로 표현된 신작 ‘침잠’은 먼 길을 돌아 안착한 작가의 내면을 대변한다. 세라믹이나 벽화, 순수회화 등의 매체를 거치고 부산과 서울, 인도를 거쳐 마침내 정착한 청도 생활, 생명의 근원인 자연에서 얻는 순수한 안정 등 현재 그의 모든 것은 고요하게 ‘침잠’ 중이다. 전시는 23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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