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인문학] 그림 한 장의 위로
[치유의 인문학] 그림 한 장의 위로
  • 승인 2022.10.20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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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삼 대구한의대 교수

집에 그림 한 점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때론 그림 한 장이 갖는 위로의 힘을. 그래서 그런지 필자의 방에는 전자제품보다 그림과 직접 만든 소품 장식들이 더 많다. 거실 한 켠에는 크지 않는 그림 한 점이 걸려있고 침실에는 고가구 위에 바람 부는 대로 자란 고사된 나뭇가지가 빛바랜 도자기 위에서 무심하게 자란다. 불 꺼진 어두운 밤, 창문을 통해 소소하게 비치는 달빛을 조명 삼아 새벽녘에 바라본 나뭇가지는 정말 숨이 멎을 듯 아름답다. 도자기 위 바람 부는 대로 자연스럽게 고사된 나뭇가지는 나에게 자연이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에서 한공주로 분했던 문소리는 극중에서 뇌성마비장애인으로 나온다. 그 영화에서 그녀는 메소드 연기의 정수를 보여준다. 중증뇌성마비 장애인 한공주는 거동이 불편해 24시간을 집에서만 보낸다. 무료하고 지루한 일상 속 유일한 친구는 침실 한 모퉁이에 걸려있는 타피스티리 오아시스 그림뿐이다. 그녀에게 오아시스 풍경의 그림은 감옥같은 방에서 영원한 자유와 안식을 허락하는 유일한 오아시스다. 절벽 같은 하루하루의 삶을 참고 견디다 희망의 빛인 종두를 만나 사랑하기까지 그녀에게 유일한 구원은 낡고 오래된 오아시스 그림이었다. 한공주에게 오아시스 그림 한 장은 생명이었다.

오랜전 기억이다. 한국의 대표적 여류문인인 신경숙 작가에게 기자가 질문했다. 글을 전문으로 쓰는 작가들도 다른 책을 읽고 감동을 받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최근에 어떤 책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냐고 묻자 신경숙 작가는 주저없이 <그림과 눈물>이라는 책을 권했다. 그림 앞에서 울어본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란 스토리가 있는 제임스 엘킨스의 책이라고 소개했다. 예술치료와 치유의 인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필자에게 <그림과 눈물>이라는 책은 그렇게 소리없이 다가왔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성당에는 '마크 로스코 예배당'이 있다. 마크 로스코는 러시아 출신의 미국 화가로 추상표현주의의 대가이며 색면추상의 1세대 작가다. 예배당의 이름을 마크 로스코를 붙였다는 것은 당연 마크 로스코와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예배당이지만 교회나 성당등 특정 종파나 교파에 소속되지 않는 독립 예배당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일반인은 물론 지미 카터와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정치인과 데스몬드 투투대주교나 달라이 라마같은 종교가 서로 다른 유명인들이 마치 성지순례하듯이 방문한다. 마크 로스코의 예배당에는 그 흔한 성화나 십자가가 하나 없다. 예배당의 그 넓은 공간은 마크 로스코의 거대한 작품들만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검은색에 가까운 색채들로 채워진 캔버스는 침묵으로 방문자를 맞는다. 사람들은 빈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그림만 바라보며 묵상에 잠긴다. 그게 전부다. 그 어떤 설명도 해설도 없다. 위로도 없고 치유도 없다. 그곳에는 오직 침묵만 있을 뿐이다. 그 침묵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참 신기한 건 그다음부터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앉아 말없이 그림을 바라보는 순간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에는 세 가지 경우뿐이다. 슬픔의 눈물과 기쁨의 눈물, 그리고 정화의 눈물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물은 바로 정화의 눈물이다. 이 눈물을 다른 말로 심리치료를 하는 사람들은 치유의 눈물, 자정의 눈물이라고 부른다. 마크 로스코 예배당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은 모두 정화의 눈물이다.

제임스 엘킨스의 <그림과 눈물>이라는 책은 바로 치유의 눈물을 흘린 사람들의 스토리를 담았다. 고흐가 숨지기 직전에 그렸다고 전해지는 '까마귀 나는 밀밭'을 보면서 37년을 고독과 가난으로 살았던 영혼이 아름다운 화가의 생애와 우리의 삶을 직선으로 연결한다. 프리다 칼로의 '상처 입은 사슴'을 보면서 내 삶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님을 배운다. 어찌 위대한 예술가들의 영혼에만 상처가 있으리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삶에는 고독과 상처가 나이테만큼 두텁게 둘러쌓여 있는지 모른다. 부모의 무게, 가장의 무게, 엄마의 무게 때문에 우리의 눈물은 사라졌다. 오랜 유교적 교육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눈물은 유약함과 패배의 상징이었다. 공공의 장소에서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고 배웠고, 눈물을 흘리면 지는 것이라고도 배웠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의해 눈물이 사라진 자리는 분노와 슬픔이 채운다. 억눌린 분노와 슬픔은 나를 갉아먹는다. 치유의 눈물을 아끼지 말라. 눈물은 당신에게 새로운 희망의 카타르시스를 선물로 줄 것이다.

가을 낙엽이 모두 떨어지기 전에 가까운 미술관에 가보시라. 아니면 가을 낙엽이 아름답게 물든 산림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걸어보라. 그곳에서 당신은 당신이 맞이할 치유의 눈물을 추앙하고 애정하고 환대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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