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버릴 것들의 목록
[달구벌아침] 버릴 것들의 목록
  • 승인 2022.10.2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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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은 다르다. 원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토록 원했던 것이 어느새 무거운 짐으로 여겨진다면 버려야 하지 않을까. 방 한 켠 구석진 자리, 먼지 가득하게 인 채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의자 하나를 내다 버렸다. 십 년이 넘도록 안방을 차지하고 앉아 텔레비전을 볼 때, 차를 마시거나 화장 할 때마다 휴식과 쉼을 주던 의자였다. 자식들이 하나둘 객지로 떠나고 집 안에 있는 날이 줄어들면서부터 의자 위엔 먼지와 햇살만이 가끔 앉았다 가곤 했다.

더는 쓸모없다고 여겨 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버려야 할지 더 두고 볼지’를 망설이며 며칠, 현관 앞까지 내놓은 후 ‘좀 더 쓸까, 이사 갈 때 한목에 버리면 되지 뭐’하며 서성이길 몇 날, 동네 슈퍼에서 폐기물 스티커를 사서 붙이고 배출 신고한 후 또 그렇게 기다리길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냥 버리면 되는 줄 알았다. 의자 하나 버리는 일에도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그리고 버리는 방법 또한 있다는 걸 버려보고 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의자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버리기 전의 그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처음부터 의자가 있었던가 싶은 정도로 금세 잊어버렸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던 박경리 시인의 책 제목처럼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24절기는 지혜를 가진 시계 같다. 그 어떤 계절도 절기 앞에선 백기를 드는지 기세등등하던 폭염의 낯빛이 움푹 팼다. 나뭇잎들이 마지막 남은 열정을 쏟아내는 계절, 가을이다. 세상 모든 초록이 단풍 들기 시작한다. 역설적으로 단풍이 든다는 건 뿌리에서 가지 끝까지 화수분처럼 뿜어 올리던 힘을 서서히 빼기 시작했다는 뜻 일 게다. 다음을 기약하며 힘을 비축하겠다는 신호 같기도 하다.

벽을 타고 올라 빨갛게 물든 담쟁이 잎들이 오월의 장미꽃보다 화려하고 어여쁘다. 역동적으로 노래하던 화단의 귀뚜라미 소리도 아스라하게 들려오고 활짝 열어 두었던 주변 이웃들의 창문도 하나둘 꼭꼭 닫아 걸기 시작했다. 밖으로 꺼내 놓고 다녔던 손들은 호주머니를 찾아든다. 한 시절에서 다른 한 시절로 지금 우리는 그 아득하고도 사색하기 좋은 계절의 경계에 서 있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가슴에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다. ‘어떻게 쓸 것인가 보다는 무엇을 쓸 것인지가 중요하다’던 신영복 선생의 ‘담론’ 중 한 구절이 혈을 뚫고 들어오는 일침처럼 내 심장을 향해 타전된다. 가끔 우린 여행을 떠날 때 ‘어떻게 짐을 꾸려야 할까’를 궁리하곤 한다. 이때의 기준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순전히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옷가지 대신 책이나 음악을 챙겨 넣은들 아무려면 어쩌랴. 짐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줄여서 어디든 가볍게 떠나고 싶어진다. 꼭 필요한 게 없어서 낭패 보는 일이 없을 만큼만 챙겨 들고 오랜 기다림 끝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떠밀려서라도.

경로를 탐색하려면 가장 먼저 내 위치를 알아야 하듯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짐의 무게가 얼마인지 내려놓기 전엔 미처 잘 깨닫지 못했다. 꼭 필요한 물건들만 챙겨 넣는다고 하지만 떠나고 나서야 항상 후회하기에 십상이었다. 버려도 되는 것들을 두고 가져갈까 말까 마음 쓰기보다는 꼭 필요한 것 중에서 무엇을 챙길까 고심하는 편이 오히려 짐을 최소한으로 줄일 방법이지 않을까.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사물의 현상은 알맞은 시기가 되어야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더 간결하게 말하자면 모든 인연의 시작과 끝은 때가 다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사람과 사람과의 인연에서든. 필요한 그것 중에서도 선별해서 나를 가볍게 만들기가 필요한 건 꼭 여행뿐만이 아닐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잘 구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쌓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내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되뇌며 까치밥이 되지 못한 채 저녁노을 속으로 동백꽃처럼 떨어져 내린 홍시를 가만가만 쓸어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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